지난 2월 14일 KBS ‘추적 60분’에 ‘7세 고시, 누구를 위한 시험인가?’가 방영된 이후 ‘7세 고시’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7세 아동을 대상으로 시험을 볼 리는 없을 테고, 도대체 무슨 시험인지 궁금할 겁니다. ‘7세 고시’란 초등학교 입학 예정인 만 5~6세 아동들이 강남 대치동의 유명 영어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시험입니다.
대치동 영어 학원들은 7세부터 무엇을 가르치겠다고 5~6세 아동을 대상으로 시험을 볼까요? 미국 초등학교 3학년 영어 교과서로 가르친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동이 3학년 국어 교과서가 아니라 미국의 초등학교 3학년 영어 교과서로 공부한다니 이건 ‘미친 짓’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13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 의대 준비반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시스
그런데 고시가 ‘7세 고시’만 있는 게 아닙니다. ‘4세 고시’도 있습니다. ‘7세 고시’에 들어갈 영어 학원을 4세부터 준비하는 영어 학원의 입학시험입니다. 4세 아동에게 영어를 어느 정도로 가르칠까요? 그것은 사교육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지난달 13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4년 유아 사교육비 시험 조사’에 따르면 유아 영어 학원의 월평균 수강료는 1,545,000원입니다. 대학 등록금보다 3배 가까이 비쌉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 현상입니다.
‘4세 고시’, ‘7세 고시’는 영어 사대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10세, 즉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수학 전문 학원 ‘생각하는 황소’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을 치르는데, 이를 ‘황소 고시’라고 한답니다. 4세부터 영어를 시작해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중학교 수준의 영어를 마스터하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의대를 목표로 초등학교 졸업 전에 고등학교 수학까지 선행학습을 합니다. 소위 ‘초등의대 진학반’에 들어가려는 게 ‘4세 고시’, ‘7세 고시’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너무 복잡해서 머릿속에 정리가 안 되죠? 대치동에서 아동 사교육은 2세에 시작됩니다. 4세가 되면 7세 고시를 준비합니다. 7세에 미국 영어 3학년 교과서를 읽고 쓸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중학교 수학 공부에 들어가고,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 고등학교 수학 공부에 들어갑니다. 무엇을 위해서? 의대에 가기 위해서!!
의대 광풍이 분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의대 광풍이 어느 정도냐면, 지난달 30일 종로학원이 대입 정보 포털 ‘어디가’에 공개한 2024학년도 정시모집 결과를 보면 서울대·연고대 자연 계열 학과 115개 중 68개의 합격선이 전국 의대 합격선보다 낮았다고 합니다. 전국의 40개 의과대학 입학생 중 꼴찌라도 서울대·연고대 자연 계열 학과 중 59.1%는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의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치대와 한의대도 33.9%입니다.
흔히 서울대·고대·연대의 영문 첫 글자를 따서 ‘SKY’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SKY’ 시대가 아니라 ‘의치한약수’ 시대입니다. ‘의치한약수’란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의 머리글자입니다. ‘의치한약수’를 나와서 고소득 전문직 자영업자가 되는 것이 대한민국 엘리트들의 꿈이 된 세상입니다.
추적 60분을 통해 알려져서 그렇지 ‘7세 고시’, ‘4세 고시’는 10여 년 전부터 있었던 현상입니다. 이미 대치동에서 목동으로, 서울에서 전국으로 확산했습니다. 그래서 지난달 18일 (가칭)‘아동 학대 7세 고시 국민 고발단’은 국회에서 ‘국민 고발 운동 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1만인 고발단’ 모집에 나선다고 밝혔습니다. ‘고발단’은 활동 계획으로 사교육 업체에 대한 국민 고발장 접수, 극단적 선행학습 사교육 규제를 위한 법 개정, 사교육 필요 없는 공교육 만들기 국가 종합 대책 제안 등에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저는 ‘고발단’의 활동에 공감하지만 실효성은 없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7세 고시’와 같은 미친 교육이 발생하고 확산하는 것은 사교육 업자들이 나라를 망치겠다고 작심하고 나섰기 때문이 아닙니다. 미친 사회의 반영입니다. 사회가 미쳐 돌아가기 때문에 교육이 함께 미쳐 돌아가는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지 도대체 어느 부모가 기저귀를 갓 뗀 아동을 영어 학원에 보내고 싶겠습니까? 그게 미친 짓임은 부모들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성장하지 않았을 테고, 설사 그렇게 성장했다 하더라도 얼마나 부작용이 많은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삶이 전쟁이고 사회가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 의과대학과 치과대학, 한의대, 약대, 수의대 준비반 관련 홍보 문구가 게시돼 있다.2024.9.22 ⓒ뉴스1
2023년 5월 23일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설문 조사 결과가 실렸습니다. 종로학원이 온라인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 1,395명을 상대로 자녀가 문과로 진학하길 희망하는지 이과로 진학하길 희망하는지 조사했는데, 이과를 희망하는 학부모 비율이 88.2%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자녀가 이과에 진학하길 희망하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자녀가 어떤 계열을 전공하길 바라는가 조사했더니 의학계열(49.7%), 공학계열(40.2%), 순수 자연계열(10.1%) 순이었고, 의학계열 중에는 의대(67.3%), 약대(13.5%), 치대(8.6%) 순이었다고 합니다. 종합하면 자녀가 의사(치과의사 포함), 약사가 되길 바라는 부모가 44%입니다. 두 명 중 한 명꼴, 즉 부모 중 한 명입니다. 그러니 사교육비를 감당할 능력이 있다면 ‘7세 고시’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의치한약수’는 한국 사회를 완전히 다른 사회로 구조 조정한 1997년 외환위기의 적폐입니다. 멀쩡한 정규직들이 정리해고 당하고,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각자도생의 사회가 되면서 변화된 직업 선호도의 결과입니다. 정년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교사, 공무원 시험에 청년들이 몰리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된 현상입니다. 20년도 더 된 현상입니다.
2023년 10월 동아일보의 조사에 따르면 20~40대 직장인들이 스스로 퇴직하고 싶은 나이는 평균 60세였지만, 실제 퇴직할 것으로 예상하는 나이는 평균 53.1세였습니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의 평균 기대수명은 남성 86.3세, 여성 90.7세가 되었습니다. 한참 돈이 필요할 50대에 직장을 나와 30년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과 EU 28개국을 비교한 자료를 보면 한국의 65~69세의 고용률은 45.5%, 70~74세 고용률은 33.1%로 유럽의 노인보다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부모 부양 책임자 인식 변화’ 조사를 보면 2002년에는 가족이 부양해야 한다는 인식이 70.7%였으나 2018년에는 26.7%로 급감했습니다. 게다가 정부의 사회 복지 예산은 OECD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40%가 넘어 OECD 평균보다 3배나 많습니다. 그러니 자녀가 고소득 전문직 자영업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7세 고시’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미친 교육을 만든 미친 사회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윤석열이 파면되었으니 새 정부가 출범하면 한국 사회의 근본적 대전환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사회 대개혁을 시작해야 합니다. 사회가 변하지 않는데 교육이 변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