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부활절 다음 날인 21일(현지 시간) 선종했다고 발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3월 첫 남미 출신으로 266대 교황으로 선출됐었다. 사진은 지난 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미사를 마치고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 2025.04.21. ⓒAP
프란치스코 교황이 8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고 교황청이 21일 발표했다. 교황청 궁무처장인 케빈 파렐 추기경은 “오늘(현지시간 21일) 아침 7시 35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성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생동안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한 봉사에 헌신했다”며 교황의 선종 사실을 알렸다.
파렐 추기경은 “그분은 우리에게 충실함과 용기, 그리고 보편적인 사랑으로 복음의 가치들을 살아가라고 가르치셨으며, 특히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습다”며 “주 예수의 참된 제자로서의 모범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혼을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운 사랑에 바친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신은 공식 애도 기간(약 15일)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될 예정이며, 이후 로마의 에스퀼리노 지역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묻힐 예정이다.
새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콘클라베)은 일반적으로 교황 사망 후 15일에서 20일 사이에 이뤄지게 된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평화를 호소한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출신 교황이자 최초의 예수회 회원 출신 교황으로 12년간 재임했다. 재임기간 전 세계 구석구석을 직접 찾아 ‘빈곤 퇴치와 평화, 환경문제’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의 해결을 호소하며 행동에 나섰다.
2013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재임 8년 만에 전격적으로 교황직에서 물러난 뒤 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교황은 사실상 종신직으로 생전에 사임한 경우는 드물었다. 1294년 재위 161일 만에 사임한 첼레스티노 5세 이후 719년 만의 일이었다. 아울러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겐 21세기에도 여전히 20세기의 신학과 전통을 고집한다는 비판도 많았는데. 베네딕토 16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보수적이던 베네딕토 16세 정반대로 변화와 개혁의 길을 걸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영화 ‘프란치스코 교황: 맨 오브 히스 워드’ ⓒ스틸컷
프란치스코 교황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이고,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936년 태어났다. 화공기술자, 나이트클럽 경비원 등으로 일하다 1955년 신학교에 들어갔고, 1958년부터 예수회 활동을 시작했다. 969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예수회의 아르헨티나 관구장을 지냈다. 199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001년에는 추기경에 서임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평생 청빈의 삶을 실천한 성 프란치스코(1181~1226)의 이름을 선택한 것도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위대한 개혁가이자 혁명가였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말로 온 세상에 혁신을 일으켰다. 모두의 모범이 되기 위해 무엇보다 청빈의 삶을 실천했다. 가난한 자를 위해 평생을 바쳤으며, 수도회를 결성해 공공의 선을 위해 애썼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 때문에 인간이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아 인간과 자연의 힘의 균형이 틀어졌다고 생각한, 시대를 앞선 환경주의자였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도 성 프란치스코의 삶과 많이 닮아 있었다. 교황은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 로마 무지개 난민 캠프와 리우데자네이루 바르지냐의 빈민가를 방문해 자신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빈곤 퇴치라고 역설했다. 그리스 레스보스에 있는 또 다른 난민 캠프에선 무관심의 세계화로 가족 사이에 벽을 치는 대신에 대화와 통합을 통해 다리를 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에선 911 테러 추모 박물관을 방문해 종교적 광신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열변했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필리핀에선 재난 앞에서 더 강한 형제애를 발휘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교황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류 모두를 팔 벌려 품에 안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교황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며 함께 그들의 친구가 되지 않겠냐고 호소했다.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교황은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평화를 늘 기원했고, 세월호 참사 등으로 생명을 읽은 영혼을 위로하기도 했다. 지난 202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을 맞아 “저는 평화의 ‘예언자’가 되도록 모든 한국인을 격려하고자 합니다”라며 한반도 평화를 기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날 인류 가족, 특히 가장 힘없는 우리 형제자매에게 고통을 주는 수많은 전쟁과 무력 충돌은, 공동체들 안에서 그리고 민족들 사이에서 정의와 우호적인 협력을 수호하고 증진하려면 끊임없는 경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비극적으로 상기시켜 줍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저는 정전협정 기념이 적대 행위의 중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는 물론 참으로 더 넓은 세상을 향하여 화해, 형제애, 항구한 화합의 밝은 미래까지도 제시할 것이라고 믿습니다”라며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의 평화를 기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014년 한국을 방문해 8월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순교사 시복미사를 앞두고 카퍼레이드를 하던 중 당시 34일째 단식농성 중인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 씨를 만나고 있다. ⓒ교황방한준비위원회 제공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해 세월호 유가족 등을 추모했다.방한 직전인 2014년 4월에는 공식 SNS를 통해 “한국 여객선 재난 피해자와 가족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열린 언론들과의 기자회견에서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교황은 유가족 전해 준 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을 방한 내내 달고 있었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여전히 착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존엄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힘과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동성애는 범죄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마 가톨릭 사제들이 동성 커플을 축복하는 것을 공식 승인하는 등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변화를 이끌기도 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2023년 12월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이라는 제목의 교리 선언문에서 동성 커플이 원하면 가톨릭 사제가 이들을 위해 축복할 수 있다고 규정했고, 이런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공식 승인했다고 밝혔다.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이 정규 교회 의식이나 미사의 일부로 행해질 수 없고, 혼인성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동안 동성 커플, 동성 결합에 대해 교리적으로 금지해왔던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생각할 때 의미가 큰 결정이다. 교황청은 지난 2021년에도 동성 결합은 이성간 결혼만을 인정하는 교회의 교리를 훼손하기 때문에 축복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8년 7월9일 볼리비아 원주민들을 만난 자리에서 카톨릭교회의 잘못에 대해 사죄했다. ⓒ뉴시스. AP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동안 가톨릭 교회가 성소수자를 배척하지 않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차례 전향적인 발언을 해왔고, 이와 관련한 연구와 노력도 이어왔다. 지난 2023년 1월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존엄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힘과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동성애는 범죄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교황의 마지막 메시지 “우리는 서로를 돌보고 깊이 연대하며 모든 인간의 온전한 발전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삶의 마지막까지 이런 인간 모두를 향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했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4월 20일 부활절 메시지를 통해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타인의 견해에 대한 존중 없이는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군비 축소 없이도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민족이 자국의 방위를 책임지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것이 군비 경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빛은 우리로 하여금 분열을 조장하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대가를 초래하는 장벽을 허물도록 이끕니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고, 깊이 연대하며, 모든 인간의 온전한 발전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