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 시간)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궁무처장 케빈 조셉 패럴 추기경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신 주위에 향을 뿌리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신은 사흘간 대성당에 안치돼 일반 신자들의 조문을 받는다. ⓒ사진=뉴시스
현집자주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근 폐렴으로 입원 치료를 받은 뒤 회복 중이었으나 21일 오전 8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사인은 뇌졸중과 그에 따른 심부전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미사는 오는 26일(현지시간) 수십만 명이 모인 가운데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짤막한 유언을 "제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 찾아온 고통은 세상의 평화와 민족 간의 형제애를 위해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로 마쳤던 교황의 삶을 되돌아본 포린폴리시 기사를 소개한다.
2013년 3월, 가톨릭 교회는 위기의 한복판에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사제의 성폭력이 드러나는 수치를, 로마에서는 바티칸에 투명한 재정 운영을 요구하는 유럽 자금세탁 방지 당국의 압력을 겪고 있었다. 교회에 대한 도덕적 신뢰는 무너지고 재정 자산도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기독교는 빠르게 쇠퇴하고 있었고, 세속화는 확산일로였다.
그 와중에 교황직이 공석이 됐다. 2월 11일 베네딕토 16세가 세계를 충격에 빠뜨리며 자진 사임을 발표한 것이다. 이는 1294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추기경 115명이 모였을 때 아르헨티나 대주교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가 4분간 짧게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이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그는 “새로운 교황은 교회가 자기 안에 머무르지 않고, 지리적으로뿐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주변부로 나아가게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바로 그가 바로 교황이 됐다. 역사상 처음으로 글로벌 사우스 출신의 교황이 탄생한 것이다.
교황청을 오래 지켜본 이들은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조직의 수장으로 선출된 이가 가난과 겸손으로 유명한 아시시의 성인을 따라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첫 공식 행사로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등장했다. 그는 화려한 붉은 벨벳 모제타 대신 검소한 흰색 사제복을 입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분명한 신호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즐기는 듯 추기경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세상의 끝까지 갔다’고 말하며, 자기가 비전통적이라는 점을 잘 안다는 것을 재치있게 드러내기도 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는 1936년 12월 17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노동자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 어머니의 5남매 중 장남이었다. 그는 할머니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곤 했는데, 가톨릭 교회가 세상과 맺어야 할 관계에 대한 신념은 바로 이 할머니로부터 전해진 ‘사회 복음’, 특히 노동자의 권리와 경제 정의에 대한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청소부, 클럽 문지기, 화학 실험실 기술자 등 다양한 일을 하다가 예수회가 강조하는 선교 정신에 끌려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열두 살 무렵부터 사제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고 1958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빠르게 승진해 36세 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를 관할하는 예수회 관구장이 됐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감도 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완고하고 고집스러웠으며, 이견이 있는 신학자나 동료 사제들을 자리에서 내쫓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런 권위적인 태도 때문에 예수회는 결국 그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400킬로미터 떨어진 코르도바로 사실상 ‘유배’를 갔다. 그곳에서 그는 고해성사를 듣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교황들의 역사를 읽으며 지냈다. 이 시기는 사제직에 대한 그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이 시기를 통해 사제의 소명은 권력이 아니라 ‘섬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충분한 기도와 성찰의 시간을 보낸 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교회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의 신임을 얻어 1992년 대주교 보좌가 됐고 1998년 대주교가 됐다. 그는 대주교의 호화로운 관저 대신, 평범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2001년 추기경으로 서임된 뒤에도 그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고, 화려한 대성당보다는 도시의 빈민가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일이 많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75세가 됐을 때 평범한 은퇴 사제가 돼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지내는 삶을 택했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가 700년 만에 자진 퇴위를 선택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교황에 선출된 며칠 뒤 프란치스코는 5,000명이 넘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꿈꾼다”고 말했다. 전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한 즉위 미사에서 그는 교회가 지녀야 할 사명을 짧고 강렬하게 제시했다. 교회 지도자는 ‘모든 피조물과 창조세계를 지키는 보호자’가 돼야 한다고 한 것이다.
교황으로서의 첫 해외 방문지는 이탈리아 남단의 작은 섬 람페두사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곳에서 지중해를 건너다 목숨을 잃은 이주민들을 기리는 화환을 바다에 던지며 ‘무관심의 세계화’를 강하게 질타했다. 이 방문은 이민 문제를 교황 재임기간 내내 핵심 의제로 삼게 되는 출발점이 됐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마테오 살비니 전 이탈리아 부총리, 오르반 헝가리 총리 등과 이 문제로 여러 차례 정치적 갈등을 빚었다.
람페두사 방문 9년 뒤인 2021년 12월 키프로스를 찾은 교황은 이주민과 난민의 현실을 강제수용소에 비유하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묻지만, 형제자매여,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기후위기를 다룬 대규모 문헌을 발표했다. 그는 기후변화가 ‘인류가 직면한 주요 위기’ 중 하나라며 무분별한 자본주의가 지구를 파괴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협한다고 했다. 그해 말 파리에서 기후 협약이 체결됐을 때, 일부 국가들은 교황의 메시지 때문에 협정에 동참했다고 고백했다.
서방 중심적이었던 그의 전임자들이 탈공산화와 탈기독교화로 인한 유럽의 정치·경제 문제에 집중했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슬림 세계와의 ‘만남의 문화’ 구축에 주력했다. 타임지와 LGBTQ 매체 《더 애드버킷》 등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는 등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교회 내부에서는 신학적 긴장이 계속됐다. 즉위 6개월 후 첫 인터뷰에서 그는 교회가 낙태나 동성혼 같은 문제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진보주의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낙태를 ‘청부 살인’에 비유하고, 성전환에 대해서는 ‘이데올로기의 식민화’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혼 후 재혼한 이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하고, 2018년에는 사형을 ‘용납 불가하다’고 교리에 명시했으며, 동성애 커플을 축복하는 것도 허용했다. 이 모든 조치는 교회 보수진영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의 고집스러움은 교황 재임 중에도 종종 드러났다. 특히 2018년, 칠레의 성학대 피해자들을 두고 그들이 가톨릭 교회를 ‘비방’한다고 일축한 사건은 큰 위기를 불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결국 해당 주교를 해임하고 “나 역시 문제의 일부였다”고 인정했다.
이듬해인 2019년 2월, 그는 바티칸에서 역사적인 회의를 소집했다. 전 세계 주교회의 의장들이 모두 모여 학대 문제 대응과 은폐 방지를 위한 새로운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학대 사건의 미흡한 대응은 교회 지도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아시시의 성자는 ‘가서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그 길을 따르려 했다. 그는 화려함을 거부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교황궁이 아닌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서류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는 모습도 그런 상징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몸짓이 보여준 더 큰 개혁의 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제, 세계 13억 가톨릭 신자를 대표할 다음 교황을 뽑기 위해 추기경들이 다시 모인다. 그들이 프란치스코가 연 길을 따를지, 전혀 다른 방향이 가게 될 지는 아직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