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지난 2018년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선생의 자택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화영 기자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향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권오헌 선생은 유신시절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올해 초 재심을 통해 46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국가보안법 피해자다. 국가보안법의 폐해와 국가보안법 등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 양심수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선생은 양심수 석방과 양심수 후원 활동 그리고 양심수들을 감옥에 가두는 악법인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지난 2017년 암 판정을 받은 이후에도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온 선생은 병세가 악화되면서 25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양심수들의 아버지’라 불리며 평생을 양심수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온 선생의 지난 삶을 2018년 ‘민중의소리’와 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양심수는 바로 불의와 모순, 특히 부당한 권력과 사회정의 실천 과정의 산물이다”
“우리 사회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용어와 기구가 있다. 한편에는 부당한 권력과 국가보안법·국가정보원·공안검찰·보안수사대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촛불시민과 정의·평화·인권·평등 등이 있다. 이 대립 사이에서 양심수가 생겼다. 양심수는 바로 불의와 모순, 특히 부당한 권력과 사회정의 실천 과정의 산물이다. 양심수는 개인이나 소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공동선을 위해 양심에 따라 활동하다 구속된 의인들이다.”
선생은 지난 2017년 ‘양심수도 국가보안법도 없는 세상’, ‘자주없이 통일없다’, ‘살아온 발자취 역사가 되어’라는 세 권의 책을 출간하면서 책 서문에 양심수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양심수 문제는 분단과 국가보안법이라는 한국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란 선생의 정의는 1937년 충남 홍성의 농촌지역에서 태어나 한국전쟁과 4.19혁명, 5.16쿠데타, 유신과 1980년대 민주화 투쟁 현장,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으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몸소 헤치며 살았던 선생의 삶과 투쟁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선생이지만 자신이 처한 고난의 시대를 학교 삼아 공부하며 이런 깨달음을 얻어온 것이다.
“식민지 시절 농촌 어디나 마찬가지였듯이 나도 가난한 환경 속에서 배우기 힘들었다. 그래서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더구나 부모님을 일찍 여의면서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내가 살아온 과정과 내가 처한 사회적 조건이 내 교육의 현장이 됐다. 이것을 통해 사회와 역사를 보는 시각을 배우고 책을 읽으며 익혔다. 학교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나름 공부하려고 애를 썼다. 중학교에 들어간 동창 책을 가져다 보면서 공부도 했고, 보통고시(공무원시험) 강의록 등을 통해 공부하기도 했다.”
권오현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명예회장이 2013년 2월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 양심수 석방과 사면-복권을 촉구하는 각계 인사 선언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에 들어가면서 선생은 4H운동에 함께했다. 농촌계몽운동인 4H운동은 Head(두뇌), Heart(마음), Hand(손), Health(건강)의 첫 글자를 따 부른 것이다. 농사 개량, 생활 재건 등 농촌 환경개선 활동을 하던 선생은 1958년 군에 입대했다. 그즈음 선생은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사상계’를 구독했고, ‘신세계’, ‘학원’ 등과 같은 잡지도와 당원은 아니었지만, 진보당 기관지 ‘중앙정치’도 읽는 등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농촌운동을 하던 시골청년이 노동현장을 만나고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에 입당에 입당하다
선생은 군대에서 1960년 4.19 혁명과 5.16쿠데타 등 격변기를 지켜봐야 했다. 제대 뒤 고향으로 돌아온 권 회장은 농촌 사회운동을 결심하고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농촌 사회운동에 나섰다. 마을회관도 짓고, 농촌에 구매부를 만드는 등 당시로선 선진적인 사업도 추진했다. 하지만 농촌 운동에서 한계를 느꼈던 선생은 새로운 길을 떠나게 된다. 충북 단양에 한일 시멘트 공장에서 노동자로 잠시 일하다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장준하, 함석헌 선생 등을 뵙고, 토론회 학술 발표회 교육 등을 쫓아다니며 공부를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건설 장비 관리 일을 하게 됐다. 그러다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에 1968년 입당하게 됐다.
“우연히 제천의 충북시멘트 현장에서 인텔리 노동자를 만나게 됐다. 박정희 쿠데타 때문에 학교서 쫓겨나 아는 이 소개로 현장에 일하고 있었던 교수였다. 그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 생각이나 사회를 보는 눈이 맞아 친해졌다. 그 분이 정치를 해보라면서 통일사회당 김철 선생(김한길 전 의원 부친)을 소개해줘서 만나게 됐다. 당시 통일사회당은 1961년 창당했다가 5.16으로 해산된 뒤에 1965년 재건한 상황이었다. 군사 정권하에서 유일한 혁신정당이라고 할 수 있고, 모인 이들의 사상적 폭도 넓었다. 김철 선생은 국제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일본에 있어서 당시에 구속이 안됐다. 김철 선생이 주축이 돼 노동당 계열 등이 참여하는 중도좌파 성향의 국제 정당 연합체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참여해 활동하기도 했다. 빌리 브란트 등 국제 인사 등과도 교류했다.”
임헌영의 소개로 시작한 남민전 활동 구속돼 3년4개월 복역한 뒤 출소한 뒤 감옥에 남은 남민전 동지들을 도우며 삶의 전환점을 만났다
선생은 통일사회당에서 문화국장, 서울제1지구당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72년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한국지부 결성과 1974년 유신에 맞서기 위해 결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경향신문 기자 출신인 임헌영의 소개로 1977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에 참여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지난 2018년 12월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제 1150회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에서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당시는 통일사회당 당원 신분을 가지고 있던 상황이어서 말하자면 이중생활을 했던 것이다. 유신 체제라는 중요한 모순 속에서 이걸 해결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비상수단으로서 남민전을 생각했다. 우선 과제가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인 만큼 남민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민족자주민족해방, 반외세민족자주, 반파쇼민주화 등 남민전의 주요 강령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다가 1979년 구속이 돼 3년 4개월 살고 1983년 2월 출소했다. 출소한 뒤에는 남민전 구속자 가족들을 챙기고, 감옥에 남은 동지들의 석방운동에 힘을 쏟았다. 내가 제일 짧게 형을 받았고, 나머지는 5년, 7년, 15년, 무기 이렇게 받은 상황이기 때문에 열심히 옥바라지하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다.”
1979년 유신정권이 내린 남민전 판결은 지난 1월 재심을 거쳐 46년 만에 무죄가 됐다. 2023년 12월 재심을 청구해 2024년 4월 재심이 결정된 이후 무죄가 최종 확정된 것이다. 당시 선생은 “유신체제라는 아주 엄혹한 시절에 유죄판결 받은 것을 이제 뒤늦게라도 무죄를 선고하니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금은 많은 남민전 피해자들이 재심을 거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들이 무죄판결을 받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민전 피해자들의 선고 형량을 길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장기수가족운동협의회’가 꾸려졌다. 1985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선생은 공동의장을 맡았다. 민가협은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된 학생학부모협의회, 민주열사유가족협의회, 장기수가족협의회, 민주인사가족운동협의회, 노동자농민구속자가족협의회 등이 모인 단체였다.
민가협 활동은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인권문제로 제기하며 공론화시켰다
민가협 활동은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인권문제로 제기하며 공론화시켰다. “남민전 구속자들이 풀려나면서 이른바 시국 사범들은 다 풀려났다. 하지만 나오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빨치산 출신으로, 또는 간첩 사건으로 수십년간 옥고를 치르던 비전향 장기수들이었다. 정치적 신념 때문에 풀려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양심수로 규정하고, 활동을 펼쳤다. 1989년 ‘민가협양심수후원회’를 결성하고 장기구금자 260명의 석방과 후원을 위한 운동과 면회, 편지, 영치금, 자매결연사업을 펼쳤다.”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분단 구조의 희생자임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이분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운동은 자연스럽게 분단 극복과 자주 통일 운동으로 밀접하게 이어졌다. 인권운동이면서 동시에 통일운동의 성격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비전향 장기수 석방과 후원에 대해 처음엔 운동진영 내에서도 주저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인권위 등에서 양심수로 규정하는 등 비전향 장기수를 일반 사회가 공유하게 됐다. 석방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국제엠네스티의 요구도 나오면서 결국 현실이 됐다. 처음엔 노약자 고령자 순으로 몇 사람 나오다가 드디어 1999년 전원 석방이 됐다. 그리고 인민군 종군기자 출신인 리인모 노인이 김영삼 정부 시절 송환이 1993년 3월 성사되면서 송환의 길도 열렸다. 그러면서 이후에도 대대적인 송환 운동을 추진하고 노력한 끝에 2000년 9월 63명이 송환됐다.”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지난 2021년 2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2021.02.15 ⓒ민중의소리
하지만 국가보안법이 가진 위력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달리진 것으로만 알았던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던 지난 2018년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정권이 막을 내리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국가보안법은 바뀌지 않았고, 양심수들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었다. 당시 선생은 이런 현실을 깊이 한탄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변화가 없다. 세월이 가면서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기도 하고, 또 나빠지기도 하지만 근본적 변화는 없다. 지난 2004년 여의도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며 단식 농성도 했지만, 당시 열린우리당 정권의 의지가 부족과 한나라당의 결사적인 저지에 막혀 끝내 무산됐다.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생명력이 질긴지, 13년이 지난 지금 문재인 정부에선 폐지 또는 개정이라는 말조차 꺼내는 걸 어려워한다. 국보법 폐지 투쟁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 보여 준다.”
문재인 정부가 물러나고, 역사는 다시 과거로 회귀했다. 윤석열 정권은 12.3 비상계엄으로 전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국민의 저항으로 윤석열은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오는 6월 3일 새롭게 대선이 치러진다. 이제 세상을 바뀔 수 있을까? 과거처럼 국가보안법은 그대로 위력 발휘할 것인가? 선생은 2018년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움직일 수 있는 한은 이제까지 해왔던 양심수 문제, 국보법 폐지, 인권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에 힘을 쏟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평화적 통일에 위해서라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의 이런 목소리는 윤석열 이후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 할 우리가 갈 방향이 어디인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