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폭력의 분출, 끝나지 않은 ‘파시즘’

싫어하는 것을 조금도 참지 못하고 제거하려는 파시즘적 폭력

12·3 내란 사태와 탄핵 가결 이후 극우 파시즘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 전후로는 우익 포퓰리즘에 관한 논의가 흥했다가, 이제는 극우 파시즘 이야기로 넘어간 듯하다. 전보다 사태가 ‘심화’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국사회에서 정말로 극우 파시즘이 전면화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를 옹호하고 민주공화정을 내놓고 부정하고 폭동, 난동을 일으키고 중국인을 위시한 외국인 및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갈수록 노골화되는 것을 보면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은 맞는 것 같다. 특히 30세 이하 청년층 그중에서도 청년 남성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들, 특히 대학교 ‘과잠’을 입고 한남동 관저 앞에서 윤석열과 포옹하고 건대입구역 인근에서 ‘윤어게인(Yoon Again)’을 외치며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식 식당이 밀집한 골목에서 난동을 부리고 상인들에게 폭언을 내뱉는 등, 폭력적인 극우 집단의 전형적인 모습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지난달 17일 주로 청년들로 이뤄진 윤석열 지지자들이 건대입구의 양꼬치 거리에서 부정선거 음모론과 중국혐오 표현을 하며 직원들과 충돌했다. ⓒ유튜브 캡처

이들이 윤석열을 지지하고 ‘윤어게인’을 외치며 난동을 부려서 극우인가, 부정선거 음모론을 믿어서 극우인가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말인즉 윤석열을 지지하지 않고 탄핵 및 파면에 반대하지 않으며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거나 처음부터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 여론조사 통계상으로는 ‘비극우’로 분류되는 사람들 안에서도 극우주의의 맹아가 암약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난 3월 ‘친구의 단톡방에 가슴이 철렁한다’라는 글에 썼듯이, 심지어 ‘탄핵 찬성 측’, 조기대선 프레임에 대해 ‘정권교체’에 공감한다고 응답한 사람들 안에도 극우주의의 맹아는 있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과격함의 힘’이라고 부른다.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지지나 뚜렷한 이념의 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은, 방향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강한 에너지를 의미한다. 다만 그 힘이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이나 선동이 가해지기만 하면 폭력적이고 극우적인 방향으로 분출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나는 예전부터 ‘청년의 보수화’라는 명제에 대해 ‘청년의 과격화’라는 명제로 응수해왔다. 방금 말한 것처럼 약간의 자극만 가해지면 곧바로 공격성으로 ‘급발진’하는 과격함의 경향의 원인을, 나는 정치와는 무관한 영역에서 찾고자 한다. 바로 감수성의 빈곤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감수성이란, 흔히 이해되는 것처럼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부터 쏟고, 계절이 바뀌고 기온과 습도의 변화에 따라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을 가리켜 감수성이 풍부하다 혹은 예민하다고 할 때의 감수성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말하는 감수성은 자신의 감정 상태의 변화, 신체가 경험하는 일체의 감응에 대한 성찰력을 가리킨다. 슬픈 영화든 기온이나 습도 변화든 외부 환경으로부터 가해지는 자극에 대하여, 의식하기 어려울 만큼 짧은 시간 안에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를 판단하고 어떻게 반응하면 적절한가를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콜롬비아 출신의 신경과학자 로돌포 이나스(Rodolfo Llinas)는 인간의 마음이란 ‘내부화된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생물체가 진화를 거치고 뇌를 발생시키면서 생물체의 운동이 바깥으로만 표출되지 않고 일부는 신체 내부로 접혀 들어간다. 예컨대 단세포생물은 일체의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행동하는 데 반해 뇌가 있는 생물은 즉시 반응하는 대신 일부 자극은 무시하고 일부에 대해서는 일말의 지체를 두고 반응한다. 이러한 지체, 간극으로부터 계산, 판단, 생각이 발생한다. 이 간극 안에 자극의 입력에서 반응의 출력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회로가 생성된다. 이것이 곧 마음의 탄생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에 대해, 이 복잡한 회로를 거쳐 분석하고 계산하여 걸러낼 것은 걸러내고, 성장 과정에서 누적해온 경험에 비추어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한다. 나는 이 회로가 단순한 사람을 가리켜 감수성이 빈곤한 사람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어린이를 웃기거나 울리기가 그토록 쉬운 이유가 어린이는 아직 이 회로를 성숙히 발달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자신이 경험하는 불쾌한 감각과 그로 인한 기분 나쁜 감정을 언어로 잘 표현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악부터 쓰고 울음부터 터뜨리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미취학 아동의 수준을 밑도는 빈곤한 감수성, 뇌내 회로의 단순함을 노정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갈수록 더 노골화되는 문해력과 어휘력의 저하 경향과 맞물려 전례 없는 퇴행을 야기하고 있다. 한 방송에서 조병영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빈곤한 문해력으로 인한 맥락 파악의 무능력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특정 단어에만 반응하고 집착하는 경향을 지적했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조금도 참지 못하고
공격하고 제거하려는 파시즘적 폭력


자신들이 싫어하는 어떤 것을 표상하는 특정 단어나 특정 이미지가 보이면 열불나고 뒤집어지는 사람들을 최근 몇 년간 많이 본 것 같다. 이른바 ‘집게손가락 논란’이 대표적이며 한 유튜브 방송 자막에서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꿔 썼다는 이유로 불거진 ‘논란’ 등 유사한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일상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모르는 단어를 썼다는 이유로 자기를 무시하냐며 다짜고짜 화를 낸다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이러한 참을성 없는 ‘급발진’은 현실에서의 폭력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2023년 어느 편의점에서 일하던 여성 직원이 숏컷 머리스타일을 했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니까 맞아도 된다’며 일면식도 없던 남성이 여성을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단순히 자신의 기분을 다소 거슬리게 하는 특정 단어나 이미지에 집착하여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공격성을 드러내는 일차원적 인간이 한국사회 전면에 드러난 순간이다. 다시 말해, 인터넷 커뮤니티 발 혐오적 ‘밈’들에 물들어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 등 포용적, 진보적 의제들에 대해 부정적 인상을 가지고 반감과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그것을 아주 조금이라도 연상케 하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오면 곧바로 ‘긁혀’ 폭주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자극의 입력부터 출력까지의 회로의 거리가 0에 수렴한 아메바적 인간의 탄생이다. 지금 목격되는 ‘극우 파시즘’의 양상은 그 반감 및 불쾌감의 대상이 중국과 중국인으로 옮겨간 것의 결과며, 그 대상은 앞으로도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옮겨갈 수 있다.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인정이론의 권위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자기 인정(self-recognition)의 관건이 자신의 심신 상태의 변화를 성찰하고 이해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가지는 감정은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에서만, 그것을 어떻게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파악 가능한 무언가가 된다. 그 적절한 표현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하면, 우리가 사회화 과정에서 남들과 소통하면서 습득한 언어의 지평에서다. 사람들은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서로 공유하는 언어를 이용해 다양한 내면의 느낌들을 이해하도록 학습했기 때문에 서로의 심리상태를 상호적으로 공감하고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 선고 일주일 만인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를 떠나며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5.4.11 ⓒ뉴스1

무언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 그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면 아직 그것을 언어화하는 방법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학습해놓은 어휘의 지평으로부터 그 느낌에 근접한 언어를 찾아내든 조합을 해내든 하는 식으로 낯섦을 상쇄하여 그것을 명확히 표현하려 하는 자세를 취한다. 이것은 성찰과 계산, 판단을 위시한 일정 수준의 지적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이러한 노력과 자기 인정은 서로를 전제한다. 주체가 자신의 욕구나 느낌을 표현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정이다. 자기 인정은 타인들과 상호작용하고 소통하는 지평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타인에 대한 인정을 전제한다. 자신의 감정을 타인들이 잘 알아듣고 수용할 수 있도록 적절한 어휘로 표현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점에서 그렇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감정 상태를 공론장에서 점잖게 표현할 어휘와 수단을 찾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때로는 폭력을 수반하며)강렬하게 표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자기 인정에 실패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기 인정의 실패는 타인들과의 인정 관계를 형성하는 데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쳐 인륜성의 토대를 위태롭게 만든다. 자기 인정의 실패는 극심한 나르시시즘과 이기주의를 낳으며, 그에 따라 사람들은 자기에게 들어오는 일체의 자극에 대한 반응과 판단의 근거를 오직 자신의 기분에서만 찾게 된다. 세상을 대하는 모든 시각이 자기 자신에게로 좁혀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바로 눈앞에서 없애버리려고 달려든다.

오늘날의 정치적 국면에서 당장 극우적, 파시즘적 언동을 노출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이처럼 반감을 느끼는 무언가에 대해 반사적으로 공격적인 반응부터 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이 나날이 많아지는 사회에서 연대는 불가능하다. 이런 사람들이 집단으로 결집하여 내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가치도 지향도 없고 다만 자신의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것들을 눈앞에서 치워달라는 요구뿐이다.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만 접근할 문제가 아니며 교육학적, 감성학적 차원에서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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