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과 박은옥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방랑과 투쟁과 좌절의 긴 시간을 지난 후 두 사람은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마을에 저녁연기 깔리는 시간이다. 나루에 배가 다니던 시간이다.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의 시선에는 과거의 풍경들이 수시로 출몰한다. 사라지는 건 없다. 정태춘 박은옥의 시간이 다르게 흐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 번도 사랑과 이별의 추억만 노래하며 목 놓아 우는 가인처럼 노래하지 않았던 정태춘과 박은옥은 도시에서, 강둑길에서, 산길에서, 항구도 없는 도시 변두리 어느 생선 구이 집 어둔 계단 아래에서 과거의 기억과 그 시간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을 마주한다.
새 음반 [집중호우 사이]에 실은 10곡을 들을 때 두 사람의 옛날만 마주하는 게 아니다. 옛날로 돌아가는 목소리에 묻어 있는 그리움과 쓸쓸함은 두 사람의 현재를 드러낸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더듬어 노래하는 애잔한 목소리는 그들이 살아온 시간이 부려놓은 삶의 무게다. 시간은 지나가고 젊음은 사라지고 풍경은 변해버리는 무정한 현실 앞에서 무릎이 꺾이지 않기는 어렵다. 아직 충분히 늙지 않은 세대는 좀처럼 떠올리거나 공감하지 못할 정서이자 태도다. 지금 세상에 수많은 음악인들이 있고, 날마다 수 천 곡의 새 노래가 쏟아지는 시대여도 정태춘 박은옥이 아니면 좀처럼 듣기 어려운 노래가 있는 이유다.
정태춘 박은옥 새 음반 '집중호우 사이' ⓒ정태춘박은옥SNS
사실 신작에 실은 두 사람의 노래는 과거에 발표했던 노래들과 겹쳐진다.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를 오래 들어온 사람이라면 수록곡마다 떠오르는 노래가 있을 것이다. 새롭지는 않은 노래들이다. 그렇다고 변함없는 노래는 아니다. 2019년에 발표한 [사람들 2019‘]나 그 이전의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를 비롯한 후기 음반처럼 정태춘 박은옥의 새 노래는 더 이상 혁명을 선동하지 않는다. 원주시 부론 강변, 지리산 악양, 송파, 마포를 다니며 보고 들은 풍경과 감상을 노래하는 곡들에는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울분과 너무 빨리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이 짙게 깔려있다.
그렇다고 오래된 나무 수피 같은 정태춘의 목소리가 기러기 떼처럼 날아가 버린 지난날에 대한 노스탤지어에만 빠져 있을 거라 예상한다면 오산이다. 그는 늘 그래왔듯 들어온 길로 다시 나가야 하는 냉정한 삶의 진실을 수용하고, 떠나고 남는 사람들이 없는 오늘을 견딘다. 향수의 노래와 인내의 노래는 다르다. 정태춘과 박은옥은 을씨년스럽고 남루한 삶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는다. “전쟁 같은 폭우 장마”를 마주해야 하는 “질펀한 각자의 참호”, “투명 비닐 봉지, 갈증의 물병들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소거시키지 않는 노래는 여전히 리얼하다.
다만 쉽사리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이들의 노래가 끝내 비관과 냉소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이 상황 속에서도 “간지러운 햇살 기다리”는 마음과 “하얗고 또는, 새파란 수국 꽃들이 흐드러지”기도 하는 진실을 찾아내고 노래하기 때문 아닐까. “여기도 누군가의 유토피아 / 저 배, 닻을 올리고 있구나”라고 노래할 줄 아는 시선은 품이 넓다. “온몸으로 피었다 결국 꽃대만 남아 / 오래 흔들리는 민들레야”, “노랗게 피었다 꿈 같은 씨앗 되어 / 세상으로 흩어지는 민들레야”라고 노래하는 목소리는 다정하다. “나라구 왜 한 때 좋은 날들이야 없었을라구”라고 노래하는 목소리는 얼마나 속 깊은가. “오, 봄이로구나 / 잘 있거라, 나는 간다”고 노래할 때의 신명은 옛 노래의 흥겨움을 꿋꿋이 이어간다.
'집중호우 사이' 정태춘
창작자 정태춘의 안정된 송라이팅은 그들의 노래가 둘의 목소리만으로 빛나지 않는 비결이다. 그가 써낸 가사의 깊이는 늘 정태춘 박은옥 음악의 특별함을 구현하며 문학에 육박하지만 음악은 문학과 다르다. 이번 음반에서도 모든 곡을 직접 써낸 정태춘은 팝과 트로트까지 활용한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면 노래로 만들어내기 어려웠을 노랫말에 최적화된 곡조와 구조를 부여해 음악을 음악답게 완성한다. 아울러 오래 함께 작업해온 연주자 박만희의 간결한 편곡은 정태춘 박은옥이 부르는 노래를 그윽하게 물들인다. ‘기러기’에 첼로가 더해지는 순간이나 ‘도리 강변에서’의 기타 솔로가 몽환적으로 흐르는 순간 음악은 “뽀얀 노을빛”처럼 퍼진다. ‘정산리 연가’의 아코디언 연주는 또 어떤가. 압도하지 않는 사운드로 스산한 마음을 감싸는 연주는 정태춘 박은옥의 음악을 들으며 항해하는 36분 10초의 시간을 정갈하고 따스하게 채운다. 두 사람의 노래가 넘치지 않고 균형을 잡는 이유다. 이번 음반을 전작과 구별하는 방식이다.
‘기러기’, ‘도리 강변에서’를 비롯한 곡들의 수묵화처럼 아득한 번짐에 젖어보라. ‘민들레 시집’과 ‘폭설, 동백의 노래’에서 박은옥이 들려주는 우아한 아름다움은 두 사람이 계속 노래를 만들고 불러야 할 근거 아니겠는가. 과욕과 거리가 먼 음악, 세상을 계속 응시하는 음악, “이제 그만 놓아라 놓아주어라, 마당가의 가을 민들레”라며 변해가는 노년의 성찰을 드러내는 음악, 특유의 서정적인 미감을 이어가는 음악은 정태춘 박은옥을 전설보다 위대한 현재로 존재하게 한다. 함께 때 묻고 낡아도 좋을 노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