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인상 깊게 본 드라마가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본 드라마는 ‘여총리 비르기트’다. 2010년 세상에 첫 시즌을 선보인 이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이 53%에 달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정치 드라마는 덴마크 민주주의와 정치의 중심지인 ‘보르겐(Borgen)’을 무대로 한다. 드라마 원제인 보르겐은 덴마크 의회와 총리실이 위치한 크리스티안보르궁의 약칭이다. 이야기는 ‘비르기트 뉘보르’란 여성 정치인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는 전체 179석 중 10석 미만의 의석을 가진 소수야당인 ‘온건당’의 대표다. 비르기트는 난장판이 된 총선 TV 토론회에서 돌연 유권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틀렸을 땐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 모르겠을 때는 질문을 해야 하죠. 제가 정치인이 된 이유는 올바른 세상에 대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대로는 안 됩니다. 함께 새로운 덴마크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화의 수단과 새로운 정치의 방법론이 필요합니다.”
내홍과 스캔 그리고 네거티브 공방전에 빠진 다른 정당 대표들 사이에서 비르기트의 불꽃 같은 2분 발언은 단연 화제를 모은다. 덕분에 온건당은 세 번째로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비르기트는 극적인 선거 승리를 이끈 공로로 총리에 오르게 된다.
최근 이 드라마를 다시 봤다. 제21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3차례 실시된 대선후보 TV 토론회를 보며 고통받은 나의 뇌를 달래줘야 했기 때문이다. 토론회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하에 경제·사회·정치를 주제로 열린 3차례의 대선후보 TV 토론회는 진흙탕 싸움 그 자체였다. 유력 후보들은 정책 발표나 비전 제시보다는 상대 후보에 대한 공격을 일삼았다. 그 이면에는 증오와 혐오가 깔려 있었고, 일부 혐오 발언은 여과 없이 온 국민에게 생중계됐다.
정책 검증보다 가짜뉴스…국민 앞에서 드러난 민낯
가짜뉴스 역시 만만치 않게 생산됐다. ‘기후위기 대응방안’을 주제로 열린 공약 검증 토론만 봐도 알 수 있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RE100은 구호일 뿐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RE100은 2050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량의 100%를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조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캠페인이다. 글로벌 기업 400여개가 동참하고 있고, LG에너지솔루션·현대자동차 등 국내 기업 36곳도 함께하고 있다. 36개 기업 중 6개 기업은 해외 사업장에서 RE100 목표를 이행했거나 거의 완료한 상태다.
정작 국내 사업장은 재생에너지 발전량 부족으로 인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높은 발전단가와 재생에너지 발전설비, 송전망 등 기반시설 부족이 RE100 달성을 늦추는 요인으로 꼽힌다. 기업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낮은 이유는 정부가 제대로 이를 뒷받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RE100은 불가능하다고 언급한 김문수 후보는 정작 대선 공약집에서 “기업의 RE100 대응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김문수 후보는 또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한 것이 아니라고 했으나, 이는 당시 현장 사진과 기록만 봐도 가짜임을 바로 알 수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전은 쓰나미로 인해 원자로 냉각기능에 장애가 발생하며 발전소 1~4호기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났다. 이 중 1~3호기에서는 노심용융이 진행됐다.
한국 재생에너지의 경제성과 잠재량이 적다는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의 주장 역시 허위다. 한국에너지공단이 2년 주기로 발간하는 '신재생에너지 백서'에 따르면, 한국의 재생에너지 시장 잠재량은 926TWh(테라와트시)다. 지리적 요인·기술 수준·규제 등을 감안한 가장 보수적인 수치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의 연간 발전량을 크게 웃돈다.
“풍력발전 같은 경우에는 개발·운영·제조 등이 외국에 넘어가 있고 대부분 그게 중국 쪽”이라는 이준석 후보의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다. 기후생태전문 탐사보도매체 ‘살아지구’가 산업통상자원부 자료를 분석한 결과, 국내 풍력발전 계획 65건 중 중국산 터빈을 사용한 경우는 2건에 그쳤다. 덴마크 등 유럽산이 41개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한국산이 20개로 뒤를 이었다. 이준석 후보의 발언은 재생에너지를 ‘친중’과 연결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마지막 TV 토론 나서는 대선 후보들 ⓒ뉴시스
기후대응 방안 TV 토론서 정작 언급되지 않은 기후 이슈들
거짓말과 조롱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돼야 할 이슈들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새 정부의 임기 중 달성해야 하는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2030 NDC) 달성방안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를 40% 감축해야 한다. 2027년부터 급격하게 감축하는 경로가 제시됐으나, 이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에 대한 해법은 부족하다.
석탄화력발전소 단계적 폐쇄 시 노동자들을 위한 정의로운 전환 대책, 농민·청소년·여성 등 기후취약계층을 위한 돌봄 정책 역시 토론회에서 언급되지 못했다. 이상기후에 따른 식량안보 대책 방안이나 인공지능(AI) 수요 증가에 따른 전력공급 방안도 논의되지 못했다.
물론 거의 모든 토론 주제가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토론회에서 기후위기 대응방안은 사실상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는 제6차 종합보고서(AR6)를 통해 “향후 10년 안에 온실가스 감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회복 불가능한 피해가 가시화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대응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나, 유력 후보들은 여전히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에 머물고 있다. 후보들에게 묻고 싶다. 후보들이 생각하는 과학과 합리성이 무엇인지 말이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계신지 말이다.
다음 정부는 우리가 기후대응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골든타임’일 것이다. 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후보들을 포함한 모든 정치인들이 기후위기 앞에서 경각심을 갖고 시민들의 목소리에 더 귀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비르기트는 극중에서 이같이 말한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대화입니다. 그런데 그 대화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화의 장을 열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