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활동이 자리잡은지는 10년이 넘었다. 그 사이 ‘마을활동’이라는 낱말을 들은 사람들도, 오랫동안 마을활동을 한 사람들도, 마을은 과연 어디부터 어디를 말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마을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인가? 대중교통을 한 번정도 타야 하는 정도일까?
마을활동을 시작한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선진지를 견학하고 내가 사는 곳과 비교해보며 좌절하기도 하고 꿈을 키우기도 했다. 내가 다녀본 마을활동선진지는 도시 안에 있어도 비교적 고립된 곳이 많았다. 대형마트나 사교육시장과 인접해있지 않은 곳, 그래서 도시생활의 기준으로 약간 불편한 곳. 마을활동은 일종의 자치다. 자치를 하는 게 나은 조건이 갖춰진 곳이 마을활동에 유리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즉, 모든 편의시설이 밀접하게 닿아있는 지역에서는 마을활동이 쉽지 않다고, 도시생활이 편리할수록 마을활동은 활성화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곤 했다. 이런 경우에는 농촌지역이나 도심에서도 뚝 떨어져 있는 주택가로만 조성된 마을활동과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수년 동안 많은 활동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마을활동에 참여할 사람들을 더 많이 끌어모을까 고민했다. 여기서 마을을 지역으로 조금 넓혀도 비슷했다. 대도시와 인접하거나, 대도시와 통하는 교통이 편리할수록 지역 내 자치는 느슨해졌다. 대도시 인접지역일수록 문화예술활동, 일상생활도 대도시에 의존했다. 대도시로 출근하면서 내가 사는 지역은 베드타운이 되어 휴일에 쉬는 정도로만 기능할 때 마을활동의 참여도는 낮았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는 어느 정도를 말할까. 보통 2km 이내를 마을로 국한할 경우 상황에 따라 인구구조는 달라진다. 어떤 마을은 2km 내 사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대도시로 출퇴근하기도 하고 어떤 마을은 그 거리 내에 사는 주민들 중 다수가 마을에서 벌어먹고 살기도 한다. 측량으로 마을의 범위를 정할 수 없었다. 같이 뭔가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여야 마을이라고 할 수 있지 않냐는 반문도 많았다.
그림1 효율적인 도시 안의 마을은 기능만 남긴다 (경기도) ⓒ필자 제공
마을의 범위는 물리적 거리로 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건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코로나를 겪으며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만날 수 없게 되었으나 오히려 멀리 있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인류는 물리적 거리를 기술로 압축해버렸다. 뉴노멀의 한 종류인 온라인 만남은 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경계도 허물어버렸다. 어디서든 접속만 할 수 있으면 함께 무엇을 도모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마을의 경계를 다시 고민했다. 마을은 어디에 있을까. 마을활동은 결국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자치의 영역인데 그렇다면 마을은 어디서나 새롭게 열리고 가끔 닫히고, 또다시 열리고 다양한 망으로 연결된 훨씬 더 복잡해진 층위가 아닐까. 나는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데이터를 연결하는 네트워크 시각화 그림을 상상했다.
마을은 대체 무엇인가
마을은 사람이고, 마을은 공동체고, 마을은 삶이고, 마을은 기쁨이고, 마을은 슬픔이고.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마을은 ○○이다에 빈칸을 채우는 활동을 자주 한다. 마을공동체에 대한 각자의 소감은 무궁무진하다. 마을은 내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마을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마을은 어떤 심연에 닿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을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렵다면 마을활동가를 정의해보는 방법이 있다.
마을활동가 1천여명 정도가 모이는 행사를 준비할 때 담당공무원은 규모와 내용이 방대하다며 ‘이 모든 게 가능하냐’고 물은 적 있다. 그에게 답변을 해야 하는 우리는 ‘마을 활동가들이라 충분히 가능하다’며 호기롭게 웃었다. 그렇다. 마을활동가들이 3명 이상 모였을 때, 불가능할 것 같던 일들이 착착착 진행되고 어디선가 누군가 부족한 일손을 메꾸고 있고, 미처 몰랐던 재주가 발휘된다. 사전에 시나리오를 짜고 고효율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는데는 서툴다. 그때그때의 돌발상황은 살아온 경륜으로 메꿔나가곤 한다. 그렇다고 마을활동이 비효율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마을활동의 목적은 이윤 창출이 아니기 때문에, 즐겁고 기쁜 것, 재미난 것, 사람을 기억하는 일에 집중할 뿐, 소득을 올리기 위한 세부적 기획안을 세우지 않을 뿐이다. 누군가 요구하지 않아도 임무를 지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착착 돌아가지만 어딘가 덜 프로페셔널하다는 평이 있는 건, 노동과 봉사의 대가를 화폐로 즉각 전환하는데 서툴러서다. 마을활동가들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지만 모든 행위를 인건비로 산출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마을은 뭘까?
그림2 빈땅을 계속 가꾸는 사람들 (경기도) ⓒ필자 제공
도시와 마을은 멀고도 가깝다
도시는 효율을 위해 조성된다. 여기부터 저기까지는 산책로이고, 여기부터 거기까지는 쇼핑공간이고, 저기부터 저기까지는 상업지구다. 90년대 신도시 계획도나 지금의 계획도나 별 차이 없다. 곡선으로 된 공간을 무시하고 직선으로 잘라내 도시를 바둑판으로 만들어 최고의 효율을 뽑아내기 위한 설계도를 쉽게 볼 수 있다. 사람은 직선으로 살지 않는데, 도시는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내가 상상하는 마을은 드문드문 옹기종기 집이 모여있고, 사람들이 모이는 커다란 나무와 평상이 있고, 그 아래 사람들이 불규칙하게 앉아 있으며, 각종 의자가 질서 없게 늘어져 있으며, 구불구불한 길이 있다. 당신이 상상하는 마을은 어떠한가.
그림3 1990년대 입주한 1기 신도시 고양 일산 개발계획도 ⓒ필자 제공
대도시가 효율을 극대화해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조성되었다면 마을은 그 반대에 가깝다. 모여서 쉬고 쉬다가 작당하고 재미난 일을 꾸미고 서로 친해지고 의지해서 상호돌봄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마을의 지향이다. 요컨대, 자본을 구축하고 생산하는 것에서 조금 멀어져 있는 것이다. 남는 것을 가게 앞에 적은 임대료를 내고 자리를 깔고 앉아 파는 게 아니라, 남으니까 나누는 게 마을이다. 옥수수가 너무 많이 열려서, 감자를 너무 많이 캐서, 고구마가 남아서, 다 먹을 수가 없어서 소쿠리에 자루에 담아 여기저기 나누는 게 마을이다. 돈을 받으라 하면 그깟 거 얼마나 된다고. 파는 데는 따로 있으니 그냥 조금 먹으라고 보내는 것이 마을이다. 남는 것을 나눌 수 있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는 감자를 좋아하니까, 누구는 감자를 안 좋아하니까, 생각하며 바구니에 담을 시간.
대도시의 시간은 급행열차가 필요하고 도시간을 연결하려는 고속도로가 필요하며 그 사이에 정확한 배차시간을 지키는 일과 시간에 맞춰 광역버스를 타기 위해 아스팔트 위를 뛰어갈 체력이 필요하다. 30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씩 돌아가는 일은 낭비다. 마을은 느리고 비효율적이다. 마을은 사건을 바라보는 태도다. 시간을 보내는 마음.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 마을
마을은 사람이 먼저다. 느리고 비효율적이어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분초를 다투지 않고 밤 11시 59분에 주문하면 내일 아침 7시 전에 도착하지 못하는 속도를 존중하는 것. 사람의 속도는 다 이유가 있다고 이해하는 것, 버스에 천천히 오르는 노인을 기다리는 것, 한손에 아이스크림을 든 아이가 가방을 제대로 멜 때까지 기다리는 것, 김치가 익기를 기다리는 것, 비가 오길 기다리는 것, 열매가 맺히길 기다리는 것, 기다리는 시간이 쓸모없지 않다는 걸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우리는 마을의 속도를 기다릴 수 있는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동시간을 줄이자는 주장과 반대하는 주장이 대립한다. 우리는 시간이 없으니까, 언제나 너무 바쁘니까, 전화를 걸어서 수다를 떨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시간이 모자라니까,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바라볼 시간이 없으니까, 누군가는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시간이 없으니까 노동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말한다. 시간은 무엇을 위해 쓰여야 할까. 그저 두면 안 될까.
사람답게 사는 일은 성과가 나지 않는 일에 시간을 쓸 자유를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본이 기계를 돌린답시고 기계의 속도에 맞춰 살게끔 인간을 굴려온 게 지난 수백 년이라면, 이제 인간이 기계를 돌려 시간의 자유를 되찾아도 되지 않을까. 이만큼이나 발전했는데,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는데, 여전히 시간이 없고 여전히 노동에 허덕이는 게 우리는 효율적인 도시에서 시간에 허덕이며 사람답게 살고 있는 걸까.
그림4 골목이 살아있는 마을 (서울) ⓒ필자 제공
자동차를 운전해서 가면 30분에 닿을 거리를 자전거와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며 2시간에 걸려 도착한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천천히 오르는 사람들을 보고, 버스에서 내리며 기사에게 인사하는 말을 듣는다.
지하철에서 멀끔하게 양복을 입은 남자가 늦은 퇴근길 좌석에 앉아 삼시세끼 밥만 해대는 예능프로를 진지하게 보고 있다. 시간에 맞춰 하루를 달리고 삼시세끼 밥만 해 먹는 타인에 삶에 위로를 받는다. 사람들은 마을을 그리워하는 게 분명하다. 조금 덜 일 하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이 모든 일을 사람이 하고 있다고 바라보고 기억할 시간. 마을의 태도와 마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도시와 마을의 경계에서 나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어디가 진짜 내가 갈 곳인지, 시끄러운 도시의 선거유세장에서 다시 한번 고민한다. 사람답게 사는 건 고층 아파트의 효율적인 동선에서 스쳐 가는 사람을 잊는 것일까, 굽이굽이 돌아가는 거친 골목에서 남의 일이 참견하는 쓸모없는 시간일까. 무엇이 무해한가. 나에게 다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