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캐릭터를 이야기할 때 곧바로 특정 배우를 연상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헤다 가블러’라는 작품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연극 ‘헤다 가블러’를 본다면 다른 ‘헤다’를 상상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무대 위에 ‘헤다’는 배우 이혜영이었고, 배우 이혜영은 ‘헤다 가블러’였다. 연극을 본 사람이라면 그것에 이견을 달 수는 없을 것이다.
개막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던 연극 ‘헤다 가블러’는 201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당시 ‘헤다’ 역을 연기한 배우 이혜영은 이 작품으로 제5회 대한민국 연극대상 여자 연기상, 제49회 동아연극상 여자 연기상을 받았다. 13년 만에 돌아온 이 작품에서도 배우 이혜영은 다시 ‘헤다’로 무대에 올랐다.
독립적인 인간이길 바랐던 한 여성의 이야기
이 연극은 ‘근대 연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이 1890년 발간한 희곡 <헤다 가블러>가 원작이다. 원작 속 헤다는 남편의 성인 ‘테스만’을 거부하고 아버지의 성이자 자신의 성인 ‘가블러’를 붙인 채 살아간다. 17세기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독립적인 인간이길 바랐던 한 여성의 이야기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25년 재연 무대에 오른 헤다는 어떤 ‘헤다’를 보여주었을까?
국립극단 ‘헤다 가블러’ ⓒ국립극단
연극 ‘헤다 가블러’의 무대는 세련되고 이름다웠다. 현대적인 가구들 뒤로 벽면은 유리 통창으로 되어 있다. 외부에서 창을 통해 헤다의 집을 지켜보게 되는 등장인물들의 동선은 무대를 한층 입체적으로 만들어 준다. 보통 관객들은 벽으로 가려진 무대를 보게 되는데 <헤다 가블러>의 무대는 유리 통창으로 되어 있어 무대 뒤까지 시야를 확장시켜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무대에는 태아와 브라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관객은 이들의 대화를 통해 헤다를 처음 만나게 된다. 부유한 장군의 딸 헤다 가블러. 그녀의 집안은 기울어 가고 있었고, 헤다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학자 테스만과 결혼을 한다. 헤다는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 테스만과 6개월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아름다운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헤다는 지루하고 권태로운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 시대 새로운 ‘헤다’를 바라며
헤다는 옛 연인 뢰브보르그가 학문적 성공을 거두고 새로운 책을 출판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게다가 다시 나타난 뢰브보르그에게 질투를 느끼며 혼란에 빠진다. 원작에 ‘판사’로 등장하는 브라크는 연극에서는 ‘검사’로 등장한다. 헤다의 새 집을 사는데 큰 역할을 한 브라크는 헤다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은 욕구를 주저 없이 드러낸다. 헤다의 남편 테스만은 헤다를 위해, 가정을 위해 적당히 거짓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나약한 지식인이다. 뢰브보르그의 미발표작 원고를 우연히 얻게 되지만 돌려주지 않고 가져옴으로써 지식인의 이중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국립극단 ‘헤다 가블러’ ⓒ국립극단
세련된 무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욕망과, 죽음으로 향하는 ‘헤다’의 발걸음은 위태롭고 불안하기만 하다. 나로 살기 위해 파멸을 선택한 헤다의 죽음은 가부장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울림을 준다. 한 개인으로 생각을 보탠다면 헤다의 서사가 고전 속에 남아있기를. 현실은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도 온전한 인간으로 우리 모두가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국립극단의 연극 ‘헤다 가블러’는 5월 16일부터 6월 1일까지 본 공연을 마무리하고, 고양 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에서 6월 7일, 8일 양일간의 공연을 남겨두고 있다.
연극 ‘헤다 가블러’
공연 장소 : 고양 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 공연 날짜 ; 2025년 6월 7일(토) ~ 2025년 6월 8일(일) 공연 시간 : 토, 일 15시 러닝 타임 : 160분 관람 연령 : 15세 이상 원작 :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창작진 : 박정희 연출/번역 조태준/윤색 황정은/드라마투르기 조만수/무대·조명 여신동/의상 최세연/음악 장영규/분장 백지영/소품 노주연/음향 윤경민/움직임 심새인 출연진 : 이혜영, 고수희, 송인성, 김명기, 김은우, 홍선우, 박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