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대법관 늘리면 독재? 한나라당도 주장한 개혁정책

판결 적체 해소와 다양성 반영 위해 증원···국힘의 말 바꾸기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지난 2025년 5월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이던 당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 2025.05.01. ⓒ뉴시스

최근 국민의힘이 자주 언급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베네수엘라다. 이번 대선을 전후해 국민의힘은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되면 ‘포퓰리즘 때문에 망한 베네수엘라처럼 될 것’이라는 등의 대국민 위협 발언의 단골 소재였다.

민주당이 사법 개혁 차원에서 추진 중인 매년 대법관 4명씩 16명을 증원해 대법관을 30명으로 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두고서도 국힘은 베네수엘라는 소환했다.

대통령 선거를 1주일 앞둔 지난달 27일 국민의힘은 소속 의원 전원 명의로 발표한 호소문을 통해 “대법관의 수를 늘려 사법부를 파괴한 베네수엘라의 현실이 대한민국의 내일이 돼선 절대 안 된다”면서 “다음 달 3일 기호 2번 김문수로 이재명 범죄세력의 총통 독재를 막고 나라를 혼란에서 구해달라”고 밝혔다.

대법원판결 적체 해소방안으로
꾸준히 논의된 대법관 증원


대선 이후 민주당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지난 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자 법사위 소속 국힘 의원들은 “대법관을 대거 증원해 사실상 권력 충성도에 따라 대법관을 임명하겠다는 발상은 베네수엘라식 독재 모델의 전형이며, 절대 대한민국에서 용납될 수 없는 시대착오적 폭거”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와 상황이 다른 베네수엘라 사례를 들어 대법관 증원을 반대하는 것이 옳은지 하는 문제는 뒤로하더라도 대법관 증원을 독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논리이다. 대법원에 사건이 몰리면서 재판이 지연되는 등의 문제 때문에 국민의 사법 접근성 향상과 대법 사건 처리의 효율성을 위해 대법관 증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계속됐다. 심지어 국힘도 한나라당 시절이던 지난 2010년 대법관 증원을 포함한 사법 개혁을 추진한 바 있다.

대법원 정문 앞 모습. ⓒ뉴스1

현행처럼 대법관 정원이 대법원장 포함 14명으로 고정된 건 1987년이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4160여만 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5170여만 명으로 1천만 명 이상 증가했다. 1990년 8천319건이었던 대법원 상고 건수는 대폭 증가해 지난 2023년엔 3만7천669건으로 4.5배 이상 늘어났다. 12명의 주심 대법관이 연간 심리하는 사건은 3천139건에 이른다. 때문에, 별도의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심리불속행 기각이 70%를 넘고, 대법원에 몇 년 이상 계류되는 사건도 있다.

대법 판결 나오는데 몇년 씩
정치적 판단 따라 달라지는 판결속도
변호사 78%도 대법관 증원 찬성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법원 또는 대법원장 등의 판단에 따라 사건의 진행속도는 천차만별이다. 몇 년이 지나도 대법원판결이 나오지 않는 사건도 있지만, 이재명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사건처럼 단 9일 만에 판결을 내리는 경우까지 있다. 이런 대법원의 선택적 판결 속도에 대해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지난달 8일 “징용 피해자 관련 사건의 판결은 미루면서 특정 정치 현안에는 적극 개입해 속도전을 벌인 대법원을 규탄한다”며 “기존 판결을 뒤집은 파기환송 판결은 이례적으로 9일 만에 처리하면서 왜 징용 피해자들의 사건은 묵히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이유로 지난 2000년대 이후 대법관 증원이 사법 개혁 차원에서 여러 차례 논의됐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도 2020년 판사 출신 민주당 이탄희 의원이 ‘인구 100만 명당 대법관 1인’ 기준 등을 들어 현행 14명을 48명까지 단계 증원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대법원에서도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2017년 인사청문회 당시 대법관 증원 의지를 밝혔고, 대법원 차원으로 2022년 상고심 개선 TF를 꾸려 대법관을 18명으로 늘려 4개 부(部) 체제로 개편하는 구체안도 마련하기도 했다.

사건을 대리하는 변호사들도 대다수가 대법관 증원에 찬성하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지난 2018년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진행한 결과 78% 대법관 증원에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기득권 중심의 현재 대법원이
오히려 획일화된 기득권 독재
다양한 목소리 반영위해
대법관 증원 필요


법은 만인에 평등하다. 법원의 판결이 모두에게 평등하기 위해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시각이 판결에 반영돼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대법원은 나이든 남성 판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여성 대법관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대법관 증원은 시대적 변화를 방영해 성, 세대, 직업, 출신 지역과 학력 등 다양성을 대표할 대법관을 늘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대법원 조형물 '정의의 여신상' ⓒ뉴시스

국민의힘은 대법관 증원이 독재로 이어질 것이라 주장했다. 독재의 또 다른 의미는 획일화다. 획일적으로 구성된 현재의 대법원 구성은 그 자체로 어쩌면 기득권 독재일 수 있다. 국힘이 주장한 베네수엘라 대법관 증원 사례도 숫자를 늘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구성의 획일화가 문제였다. 이런 문제라면 증원을 반대할 게 아니라 대법관 선출 또는 검증 방식을 지적했어야 한다.

국힘의 주장은 매번 이런 식이다. 매번 선거 때가 되면 비례대표제를 폐지하는 등의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자고 주장한다. 세금 낭비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당투표에 의한 비례대표제를 만든 건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입법에 반영하고, 소수에 의한 입법 독점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취지를 무시한 채 세금 낭비를 이유로 줄이자고 주장하는 게 오히려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대법관 증원을 반대하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사법이 소수에 의해 권력화되는 것을 막고, 다양한 사회적 목소리가 반영해야 하는 취지는 외면한 채 증원 자체가 독재인양 주장하는 건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다.

대법관 증원 법안은 법사위를 통과했지만,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로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사회적 논의를 통해 대법관 증원이 늦지 않게 이뤄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