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남’은 ‘이삼십대 남성’의 줄임말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이삼남 이야기’는 2030세대 젊은 남성 필진들이 번갈아 쓰는 칼럼입니다. 청년 이슈와 온라인 여론 등을 주제로 한 달에 두 번 게재 예정입니다. 혐오와 갈라치기, 무관심과 오해를 넘어 건전한 공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출구조사 결과는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왜 20대 남성의 72.5%는 보수정당 후보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는가? 이는 전통적 보수 지지층인 60대 남성(70.2%)보다도 높은, 그야말로 이례적인 수치였다. 이 현상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의 대선과 총선에서도 20대 남성은 독자적인 표심을 드러내며, 한국 정치의 주요 변수 중 하나로 떠올랐다. 같은 세대 여성과의 극단적 정치성향 차이는 20대 남성을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만들었다.
누군가는 이를 '전세계적 청년 보수화'로 해석했고, 다른 누군가는 '페미니즘 백래시'라 불렀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현상의 겉만 핥을 뿐, 그들의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운영체제(OS)'를 설명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이해 없이 내놓는 대책이 왜곡된 현실 인식을 바꿀 수 있을리 없다.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 틀은 북칼럼니스트 남궁민이 2021년에 제시했던 '게임화된 세대'라는 가설에 있다. 20대 남성을 단순한 보수주의자로 해석할 게 아니라, 게임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유형의 유권자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롤, LOL) 화면 ⓒ자료사진
1. 게임의 문법으로 세상을 해독하다
20대~30대 남성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게임'은 가장 중요한 고리다. 필자를 비롯한 많은 남성 청년들이 별다른 취미 하나 없이 '게임'으로 10대 청소년기를 보냈다. 또래 친구들과 게임을 통해 관계 맺으며 성장했다. 21세기 시작과 함께 PC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성장한 것도 지금의 20대~30대 남성이다.
그 중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는 지난 10년 이상 PC방 점유율 1위를 지키며 현재 20대 남성 문화의 근간을 이룬 게임이다. 롤은 이전의 국민게임들과 전혀 다른 성격이 존재한다. '즉석으로 강제된 익명 팀플레이'에서 비롯되는 상호작용의 양상이다. 스타크래프트는 기본적으로 1:1 개인전이었기에 패배의 원인이 명확히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 MMORPG는 길드나 파티 단위의 협동이 이뤄지지만, 자발적이고 장기적인 공동체적 관계에서 평판을 쌓아야 했다.
롤의 세계는 15분에서 30분 남짓한 짧은 시간 안에, 익명의 팀원과 만나 오직 승리라는 단기적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무한경쟁의 장이다. 이곳엔 장기적 신뢰나 연대보다 즉각적인 실력과 결과가 중요하며, 패배의 책임은 가차 없이 '트롤(Troll, 고의로 게임을 망치는 유저)'에게 돌아간다. 여기서 롤의 상징과도 같은 "정치질(정치)", 쉽게 말해 남 탓하는 문화가 탄생했다.
롤의 랭크 게임에서 낮은 티어(계층)로 분류되는 '아브실골(아이언,브론즈,실버,골드)'에 대한 멸시는 어마어마하다. 웃긴 건 '아브실골'에 해당하는 유저층이 72%에 달한다는 것이다. 롤 유저의 거의 대부분이 해당하는 이들이 혐오의 대상이 될 정도로 능력주의가 팽배하다. 이는 2018년 '국평오(국민 평균 5등급)'라는 표현으로 비슷하게 재등장한다. '국평오'는 국민의 평균 지능이 수능의 중앙값인 5등급을 받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사회문제들이 국민의 평균 지능이 이정도로 낮기 때문에 벌어진다는 것이다.
청년 남성이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거나 특정 게임이 문제라는 말이 아니다. 필자 또한 롤이 국내에 서비스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즐기는 올드 유저다. 이들을 탓할 게 아니라, '롤에 바탕을 둔 문화'의 영향력 아래 청년 남성이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에 주목하자는 말이다. 게임의 문법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현실 세계를 해석하고 정치적 사안을 판단하는 강력한 렌즈로 작동한다. 이 렌즈를 통해 보면, 20대 남성의 정치적 요구는 비로소 일관된 논리를 갖춘다. 그 일관된 논리 속에서 때로는 자기 자신을 옥죄거나, 현실을 왜곡해 인식하게 된다.
첫째, 경제는 '랭크 게임'이다. 인생은 개인의 실력(능력)에 따라 티어(계층)가 결정되는 무한경쟁이다. 이들의 세계관에서는 "티어"를 나누는 게 상식이며, 모든 이들이 챌린저(최상위 티어)일 수 없다. 노력해도 공정한 대가를 받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들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것은 시험 점수처럼 명확한 규칙과 정량적 평가다. 그들은 공평한 매치메이킹 시스템, 즉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을 요구하며, 특정 챔피언(집단)에게 부당한 '버프(buff, 상향)'를 주는 '패치(정책)'에 격렬히 저항한다. '인국공 사태'에 대한 분노는, 정당한 경쟁을 통해 티어를 올리려는 유저들 사이에서 누군가 '버그'를 이용해 순위를 조작하는 것을 목격한 것과 같은 배신감이었다.
둘째, 젠더 정치는 '밸런스 문제'다. 이들에게 페미니즘은 약자의 인권 운동이 아니라, 게임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OP(Over-Powered, 지나치게 강한)' 이데올로기로 여겨진다. 윗세대 남성 플레이어의 '치팅'에 대한 대가를 자신들이 대신 치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은 병역 의무 등으로 부당하게 '너프(nerf, 하향)' 당한 피해자이며, 이준석 전 대표가 외친 '여성가족부 폐지'는 여성에게 기울어진 게임의 균형을 맞추려는 '밸런스 패치' 요구라 여긴다. 실제로 20대 남성의 상당수(62.9%)가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에 거부감이 든다'는 반페미니즘 성향을 보이며, 남성에 대한 차별이 심각하다 생각하는 비율도 61.9%에 달한다(내셔널어젠다2024~2025). 이는 다른 모든 세대, 성별과 구별되는 그들만의 왜곡된 현실 인식이다.
셋째, 정치인은 '플레이어'다. 이들은 위선적인 '트롤'과 무능한 '충(벌레 같은 플레이어)'을 경멸한다. 진보 진영 고위 인사들의 성 비위 사건과 그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최악의 '트롤링'으로 각인되었다. 대신 명확한 판단과 실행력으로 팀을 승리로 이끄는 '캐리(Carry)'형 플레이어에게 열광한다. 이준석의 직설적 화법과 '잘못된 플레이'를 저격하는 모습은 이들에게 익숙하고 유능한 리더십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진다.
2. '극우'라는 오독, 그 안에 숨은 계급적 분노
많은 이들이 '이대남의 극우화'를 우려한다. 실제로, 20대 남성(혹은 여성)의 일부에서 윤석열의 내란을 지지하거나 서부지법 폭동을 옹호하는 현상이 존재하지만, 아직 주류라 보기는 어렵다. 이들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강력히 처벌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 안티 페미니즘과 반공 정서, 능력주의를 추앙하는 경향이 짙어지는 것을 '극우화'의 전조로서 경계해야 하지만, 이들을 현재 "극우"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20대 남성들이 주로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에펨코리아' 등을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와 같은 성격의 극우 커뮤니티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을 단순한 극우나 수구 기득권과 동일시하는 것은 현상의 핵심을 놓치는 위험한 오독이다. 이러한 낙인찍기는 '극우'와 '청년 남성 일반'의 감정적 결합을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 둘을 정확히 갈라 봐야 한다. 이 둘을 구분해 인식하고, 다른 대응책을 내놓아야 한다.
'펨코'와 같은 커뮤니티에는 진보 진영이 주목할만한 분노가 조직되지 않은 채 흩뿌려져 있다. 이들은 산업재해로 스러져간 노동자의 목숨에 함께 슬퍼한다. 청년 노동자를 폭염에 1시간 동안 방치해 죽음으로 내몬 사업주, 그리고 그에 무혐의를 내린 노동부에 분노한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절망에 공감하며 전세사기 근절을 위해 정치권이 강력하게 행동하길 요구한다. '채상병 사망 사건'의 진실을 요구하고 박정훈 대령의 구명에 목소리를 높인다. 지방을 살리기 위한 국가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향은 이들을 '극우'라거나, '보수'라고 단정 짓기 어렵게 만든다.
청년 노동자를 폭염에 1시간 동안 방치해 죽음으로 내몬 사업주, 그리고 그에 무혐의를 내린 노동부에 분노하는 펨코 유저들 ⓒ필자 제공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게임적 세계관'이 가장 일관되게 작동하는 지점이다. 그들의 분노는 '규칙을 어긴 강자'와 '규칙을 지키다 희생된 약자'라는 구도에 정확히 부합할 때 폭발한다. 산업재해 희생자는 안전수칙이라는 기본적인 '게임 룰'을 지키지 않은 시스템(기업)의 희생양이다. 전세사기 피해자는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한 사기꾼에게 약탈당한 플레이어다. 채상병은 국가의 명령이라는 신성한 ‘게임 규칙’을 따르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휘관의 잘못된 결정으로 희생된 플레이어다. 그리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시도는, 게임의 버그를 인정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유저를 탄압하는 부당한 운영으로 인식된다.
이런 것이 청년 남성이 지니고 있는 '계급적 분노'다. 이들이 분노하는 대상은 전통적 의미의 '자본가 계급'이 아니라, 시스템의 규칙을 자의적으로 바꾸고 이용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모든 '특권층'이다.
재벌의 세습, 정치인의 위선, 그리고 국가 권력의 남용은 모두 이 '특권 계급'의 반칙 플레이로 간주된다. 이들의 분노는 좌우의 이념이 아니라, '공정한 규칙의 적용'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을 향한다.
3. 진보의 언어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기성의 진보 정치가 이들의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문제가 커진다. 진보가 '구조적 모순', '역사적 맥락', '공동체적 책임'이라는 거대 담론을 이야기할 때, '게임화된 세대'는 개인의 실력, 투명한 규칙, 즉각적인 결과라는 게임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 서로 다른 논리 회로와 언어 체계를 사용하니, 대화는 공허하게 엇나갈 수밖에 없다. 진보는 이들을 '철없는 아이들' 혹은 '도덕적으로 그릇된 집단'으로 규정하며 훈계하려 들고, 이는 이들에게 또 다른 '꼰대'의 위선으로 비칠 뿐이다.
진보의 가치를 그들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구조적 불평등 해소’라는 낡고 납작한 구호를 넘어, 시스템을 해치는 ‘버그’를 명쾌하게 짚어내야 한다. ‘사회 안전망 확충’도 뉴비 혹은 실력이 떨어지는 플레이어도 게임을 즐길 수 있어야 게임이 망하지 않는다고 설득해야 한다. 그 외의 정책을 설명할 때도 ‘정의로운 결과’라는 당위 보다 ‘현실성 있는 과정’을 표현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채상병 사건에 대한 분노가 곧 국가의 책임을 묻는 진보의 가치임을, 전세사기 피해자를 향한 공감이 바로 주거권을 보장하고 약자를 지키려는 진보의 목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모두가 안전한 게임의 규칙‘을 새롭게 만들자는 운동이기에, 남성의 적이 아니라고 설득해야 한다. 그들의 분노가 향하는 ‘특권과 반칙’이야말로 진보가 맞서 싸우는 적이라는 사실을 알리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분노를 정확히 읽고 진보의 언어로 응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