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는 고장난 자본주의를 리셋할 능력이 없다

편집자주

40년간 미국 경제는 꾸준히 성장해 왔다. 하지만 그 수익은 위로만 흘렀다. 1979년 이후 하위 90%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고작 44% 늘어난 반면, 상위 1%는 180% 넘게 상승했고, 상위 10%는 전체 자산의 7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 사이 중산층의 소득 점유율은 62%에서 43%로 줄었고, 하위 50%는 미국 전체 자산의 3%도 갖지 못한다. 생산성은 올랐지만 임금은 멈췄고, 그 격차는 배당과 자사주 매입으로 메워졌다.

이 구조는 위기 속에서 더 강화됐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7,000억 달러에 달하는 구제금융은 민간 자본을 구제했지만, 그 대가는 공공 부채와 복지 삭감이었다. 시장은 회복했지만 사람들의 삶은 회복되지 않았다. 위기를 견딘 건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였고, 그 고통은 다시 자산으로 전환됐다. 이제 경제를 다시 리부트할 때가 됐고, 이를 진보 진영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애틀란틱 기사를 소개한다. 

원문:   The World Economy Is on The Brink of Epochal Change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캐나다 앨버타주 카나나스키스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회담을 가진 뒤 취재진을 만나고 있다. ⓒ뉴시스

세계 경제는 마치 슈퍼컴퓨터 같다. 가격과 수량에 대한 수많은 계산을 처리하고  소득, 부, 이윤, 일자리에 관한 정보를 뱉어낸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작동한다. 매우 효율적인 정보처리 체계인 셈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도 다른 컴퓨터처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모두 필요하다. 하드웨어는 시장, 제도, 규제 체계 같은 경제의 물리적 구조를 말하고, 소프트웨어는 당대의 지배적 경제사상, 즉 사회가 ‘경제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내리는 판단이다.

이 슈퍼컴퓨터는 대부분의 경우 꽤 잘 작동한다. 하지만 가끔씩 시스템이 멈춘다. 보통은 새로운 문제에 대응할 새로운 아이디어, 즉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가 해결됐다. 그러나 때로는 하드웨어 자체를 고쳐야 할 때도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Ctrl+Alt+Del’ 순간이다. 관세 전쟁, 미국 부채에 대한 시장의 불안, 소비자 신뢰 추락, 달러 약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방치하는 정부. 이런 속에서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과 개방 사회를 지향해온 세계화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지금 세계 경제는 하드웨어를 교체하고 새로운 운영 체제를 시험 중이다. 지난 100년 동안 없었던 전면적인 재부팅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지금의 세계가 일시적으로 우경화된 것일 뿐 결국은 1990~2000년대 초의 온건한 시기로 돌아갈 것’이라는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 지금 변화하는 것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컴퓨터의 아키텍처다.

자본주의의 다음 버전이 어떻게 작동할지는 우리가 어떤 소프트웨어, 즉 어떤 경제사상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경제가 무엇인지, 경제가 누구를 위해 봉사할지를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

경제가 마지막으로 전면 재부팅된 것은 1930년대였다. 1929년 월가 대폭락으로 인한 유동성 위기와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맞물리면서 미국의 상업 활동은 마비되고 대공황이 시작됐다. 은행 도산은 곧 산업 전반의 연쇄 붕괴로 이어졌고 임금은 폭락했다. 실업률은 일부 지역에서 노동력의 4분의 1에 이를 정도로 치솟았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으로 국가 개입을 강력하게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안정되고 지속적인 성장을 시작한 건 1940년대 들어서였다. 전시 군비 확충이 막대한 산업 자극제가 됐기 때문이다.

전후에 새로 구축된 경제 시스템은 1930년대의 재앙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설계됐다. 새로운 소프트웨어, 즉 ‘완전고용’을 경제의 중심 목표로 삼는 새로운 통치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드웨어도 개조됐다. 자본을 국외로 유출하지 못하도록 제한함으로써 부유층이 자본을 국내에 투자하게 만들었고, 부유층은 이윤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에 투자해야 했다.

이 선순환 구조 속에서 생산성이 높아지면 임금도 높아지고, 국가는 그 임금을 세금으로 거둬 복지로 재분배할 수 있었다. 높은 한계세율 덕분에 국가는 막대한 재정 지출 능력을 갖췄고, 미국식 복지국가가 탄생했다. 노동조합은 기업의 파트너로 간주됐고, 정치 정당은 중산층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경쟁했다. 그렇게 양당 체제는 사실상 중도 노선을 공유하며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유사해졌다.

뉴딜은 대공황의 재발을 막는 데 분명히 성공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함이 있었다. 완전고용을 위해 경기를 과열시키다 보면, 생산성 향상만으로는 기업이 임금 인상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이윤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자, 임금과 물가는 오르는데 이윤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미국 자본가 계층은 리셋 버튼을 눌렀다. 정치활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싱크탱크와 언론사를 후원하며 자유시장 경제를 홍보해서 결국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레이건은 노동조합을 무너뜨리고 시장을 규제완화하면서, 자본이 노동조합이 강한 지역에서 ‘노동권 제한 주’로 빠르게 옮겨갈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사실상 본격적인 해외 아웃소싱 전 단계였다. 동시에 연준 의장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금리를 거의 20%까지 끌어올려 혹독한 경기침체가 뒤따랐다. 실업률도 높여서 노동계에 또 다른 압박을 가했다.

이 시기부터 완전고용은 더 이상 경제의 중심 이념이 아니었다. 대신 물가 안정, 자본 이동의 자유, 세계화를 통한 이윤 회복이 우선순위가 됐다. 하드웨어도 바뀌었다. 중앙은행은 독립성을 부여받아 물가 안정과 자본 수익성 회복을 위한 도구로 전환됐다. 이런 우선순위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의 유명한 표현 ‘대안은 없다‘로 정당화됐다. 이 새로운 시스템은 ‘신자유주의’로 알려지게 됐다.

이 컴퓨터가 다시 매끄럽게 돌아가기 시작한 건 1992년 무렵이었다. 당시 미국은 벤 버냉키(후일 연준 의장)가 ‘위대한 조정기‘라 부른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세계화는 선이고, 금융이 미래라는 분위기였다. 중앙은행은 지속 가능한 번영을 이뤄냈고, 투자자 계층은 글로벌 차원에서 이윤을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도 결함이 있었다. 이윤 증대는 국내 생산성 향상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 내 안정된 산업 지역에서 일자리와 기술, 자본이 빠져나간 결과였다. 동시에 금융 시장은 규제 완화로 인해 대규모 신용 공급이 가능해졌고, 이것이 임금 정체와 심화되는 불평등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

이건 결국 심각한 하드웨어 문제로 이어졌다. 2008년 넘쳐나던 신용이 부채의 쓰나미가 돼어 시스템을 또 한 번 붕괴시켰다. 독립적 중앙은행이라는 당시의 하드웨어는 민간 부문에 천문학적 구제금융을 쏟아부어 시스템을 간신히 지탱했다. 하지만 그 비용은 공공부문이 떠안았고, 재정 긴축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 고스란히 전가됐다. 그렇게 최악의 경기침체에서 가장 느린 회복이 이어졌고, 서구 사회 곳곳에서 깊은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그리고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트럼프는 다음 리부트를 위한 촉매제가 됐다. 공화당을 장악한 그는 노동자 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포퓰리즘 연합을 만들어냈다. 트럼프의 대중적인 반중 정서는 다소 즉흥적이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소외됐다는 미국 노동자의 분노를 대변했고, 이는 실제 존재하는 불만에 기반한 것이었다.

트럼프의 첫 임기는 시스템을 강제 리셋하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웠지만, 그의 두 번째 임기는 바이든 정권이 추진했던 ‘신자유주의를 유지하면서 일부 산업을 재건하는 제한적 뉴딜’ 모델을 폐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수십 년 만에 등장한 본격적인 산업 정책이었지만, 트럼프는 이런 개입을 포기하고 오직 관세 하나로 산업 회귀를 유도하려 한다.

트럼프식 접근이 나름의 체계를 가진다면, 그 목표는 자국 노동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 즉 탄소 집약적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이민자를 노동시장 밖으로 밀어내며, 여성들에게는 출산과 가사노동으로의 복귀를 독려하는 식이다. 이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낡은 시스템을 짜깁기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대처주의와 비교해 이를 ‘퇴행적 현대화‘라 불렀다. MAGA 경제는 1950년대의 남성 제조업 중심 경제, 1940년대의 여성 가정 복귀, 엄격한 이민 통제라는 역사적 요소를 조합한 것이다. 여기에 19세기형 ‘세력권 중심’ 외교 정책이 더해진다.

트럼프식 경제는 과거의 기억을 모아 구성된 임시 체계인 것이다. 명확한 새로운 경제 질서는 아직 없다. 중심이 되는 통치 이념 자체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화당을 노동자 정당으로 탈바꿈시키려는 국민보수주의 진영이 하나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외에도 이 흐름을 주도하려는 세력은 여럿 있다. 실리콘밸리의 ‘다크 계몽주의’ 진영도 그중 하나다. 이들은 AI에 과도하게 투자한 상태에서, 원래는 명문대 연구기관에 돌아가야 할 정부 자금을 자신들의 기술 프로젝트로 끌어오려고 한다. 그들이 상상하는 미래는 중장비 산업의 과거가 아니라, 자동화와 우주 개척이라는 탈인간적 미래다.

하지만 문제는 이거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래로 점프할 수도 없다. 우리는 오직 현재를 살 수밖에 없다.

포퓰리즘 우파의 리셋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관세가 일부 산업을 되살릴 수는 있지만, 그 공장을 채울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로봇이다. 여성이 과거처럼 가정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발상 역시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기술 미래주의자들이 제시하는 비전은 인류 대다수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하며, 오직 그 실현에 투자한 기술 재벌들만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정체된 상태에 놓여 있다. 업데이트는 예정돼 있지만,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 우파는 ‘퇴행적 현대화’를 새로운 시스템이라 주장하고 있고, 좌파는 아직 어떤 길을 택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한 가지 선택지는 지금처럼 민주당의 노년 엘리트가 버티면서, 트럼프주의가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당이 선택할 가장 가능성 높은 전략이긴 하지만, 트럼프 이전의 정치로 복귀하지 않는 한 그 전략은 실패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의원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이끄는 반재벌 운동은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두 번째 선택지를 내세운다. 하지만 이 길이 트럼프에게 끌린 청년 남성과 진보 성향이 강한 청년 여성 모두를 끌어들이며 충분히 넓은 연합을 형성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세 번째 접근법은 최근 에즈라 클라인과 ‘애틀랜틱‘의 데릭 톰슨이 주창한 ‘풍요 의제’다. 이는 규제를 줄이고 성장을 촉진하는 진보적 정책을 통해 경제 활력을 다시 불러오자는 구상이다. 하지만 좌파 내부에서는 이 전략이 기업 권력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트럼프의 재선 기반이 된 퇴행적 현대화에 맞서려면 좌파가 경쟁 가능한 새로운 경제 이념을 제시해야 한다. 이전 체제를 미세 조정하는 기술관료적 해법은 더 이상 넓은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 가장 유망한 길은 버니 샌더스식 포퓰리즘에 기술관료가 아닌 정치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풍요’ 전략을 접목시키는 방식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장이 배제한 수백만 명의 미국인과, 통치 엘리트로부터 소외된 시민들이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런 프로젝트가 실현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지금 우리가 하나의 전환점에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경제 질서가 꿈틀대지만 아직은 유동적인 상태다. 지금이 바로 그 틀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리 뒤죽박죽된 전략이라 해도, 지금의 우파 전략이 승리할 수도 있다. 우리가 경제란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새롭게 정의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목적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민주주의 사회에 충분히 존재해야 한다. 새로운 사상은 이미 존재한다. 이제 필요한 건, 그것을 실행할 용기를 가진 정치인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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