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장 사랑받는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경계인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다양성연구소에서 ‘경계그룹(Boarder Group)’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각나게 하는 서사를 갖고 있어 참 인상적이다. 경계그룹은 억압그룹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면(말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알 수 없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특권 그룹으로도 인식해서 특권 그룹으로 대해는 상황들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필자주
*억압 그룹(Oppressed Group, Target Group)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그룹만을 이유로 특권 그룹의 사람들에 의해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로 인해, 사회적 자원(부, 명예, 네트워크 등)에 다가가기 한 발 더 어려워진다.
*특권 그룹(Privileged Group, Agent Group)은 자신이 속한 그룹만을 이유로 ‘정상성’을 주장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로인해, 사회적 자원(부, 명예, 네트워크 등)에 다가가기 한 발 더 쉬워진다. 특권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특권을 인지하든 하지 못하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권으로 인해 이익(사회적, 경제력, 문화적 이익 등)을 얻는다.
케데헌의 주인공 루미의 이야기는 퀴어 서사를 가지고 있다. 루미의 몸에는 문양이 있는데 이 문양 때문에 루미는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이 문양은 인간에게는 없고 악귀들에게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미와 루미의 그룹 ‘헌트릭스’는 악귀의 문양을 가진 악귀들과 귀마를 물리치는 것을 사명으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헌트릭스’는 문양을 가진 존재들을 다 죽여야 한다고 믿는다. 루미도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 자신도 문양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이다. 자신을 키워준(자신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 셀린(양어머니)으로부터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자 너무나도 중요한 일을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도 ‘절대로 들키면 안된다’고 교육받으며 철저히 숨기며 살아왔다.
우리는 자신의 양육자, 교사, 또래그룹, 종교 지도자, 미디어 등을 통해 때때로는 아주 명확하게 또 다른 경우에는 은근한 사회적 분위기나 문화로 ‘모든 사람들은 시스젠더 이성애자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신의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절대 드러내면 안된다’고 배우고 있다. 그런 사회 속에서 비퀴어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믿게 된다. 퀴어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을 ‘잘못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루미가 계속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처럼.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넷플릭스
케데헌의 경계인에 대한 서사 : 이주민
다른 경계그룹도 떠올랐다. 바로 이주민들이다. 특히 자신과 겉모습이 같은 지역의 사회(국가)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이 생각났다. 북미나 유럽과 같이 백인중심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동양인, 아시아인)처럼 자신과 겉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주류”인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외모로 드러나기 때문에 인종, 민족, 출신국가 등에 대한 차별을 경험하며 정체성과 관련한 수많은 고민, 고통을 가지고 살아간다. 루미가 경험하는 억압은 자신과 겉모습에서 차이가 없는 지역에 살면서도 자신의 ‘뿌리’와도 같은 자신의 정체성들 중 일부(자신 혹은 양육자의 출신 국가나 민족)를 부인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억압과 더 닮았다.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중국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주민들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밖에 하지 못하고 이름에서도 외모에서도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도 입국의 경우에도 외모든 언어든 어디에서도 이주배경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일본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고정관념, 편견, 낙인, 차별, 학대, 폭력, 억압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재일교포들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다양성연구소는 서울시 구로구에서 다년 간 활동했다. 구로에 있는 많은 초중고 학교들에 이주배경을 가진 어린이 청소년의 비율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15%, 30%를 시작으로 50%, 75%가 되는 학교들도 있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 학교에서도 파악하지 않고 있고 파악할 방법도 없기 때문에 실제 이주배경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의 수는 학교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많다고 한다. 어떤 학교에 교육을 나갈 때, ‘이주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많다’는 정보를 듣고 방문을 하더라도, 누가 이주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름, 얼굴, 언어(억양) 등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소위 티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이 이주 배경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살까? 그렇지 않다. 혹여라도 차별과 폭력을 경험할까 두려워 알리지 않고 사는 것이 최선으로 여겨진다. 특히나 지금처럼 가짜뉴스에 기반한 혐중(중국 및 중국인 혐오) 정서가 심각한 상황에서 중국 배경을 가진 이주배경 청소년들은 자신의 정체성 중 일부를 숨기고 사는 것이 낫다고 감각할 것이다.
케데헌의 경계인에 대한 서사 : 신경다양인
또 다른 경계인들도 생각났는데 바로 ‘신경다양인(Neurodivergent)’ 이다. ADHD나 자폐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우울, 조현, 공황 등 정신질환이나 정신장애로 표현되는 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여러 신체 장애와 달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정신 장애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혐오와 낙인에 의해 쉽게 알릴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밝히지 않는다면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신경전형인(Neurotypical)’로 여긴다. 자신의 상태와 상황을 주변에 공유하고 도움을 받을 것은 도움을 받으며 서로 조율하고 합의하며 맞춰가는 것이 서로에게 훨씬 좋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신체와 정상적인 정신”에 대한 기준과 “비정상(비효율)”에 대한 혐오와 낙인 때문에 자신의 상황과 필요를 주변에 알리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신경다양인뿐만 아니라 신경전형인을 포함한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심각한 수준의 과로사회이자 성과중심사회인 한국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효율과 성과를 쫓아야 하고 그것을 해낼 수 없으면 낙오자가 되며 그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 되기 때문이다.
신경다양인들은 검사와 진단 그리고 약 복용을 통해 충분히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정신과와 정신과 약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낙인과 편견으로 인해 정신과 출입의 문턱이 놓아 약 복용율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약의 적절한 도움을 받고 있는 신경다양인들도 약에 대한 여러 가지 복잡하고도 어려운 마음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약이 자신을 사회 속에서 효율적으로 기능하게 해주는 것에 안도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사회적 기준(‘정상’ 혹은 효율 등)에 맞추며 사는 것에 대해 고민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할까?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을 인정하지 못하고, “정상”이라는 기준에 모든 사람을 끼워 맞추고 있는 사회에 저항을 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고민들과 갈등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 사회를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가?’ 고민하며 스트레스 받으며 산다. 사람들이 누구나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고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루미의 내재된 억압과 자기혐오
루미의 상황처럼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전부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최대한 꽁꽁 숨기는 것이 생존과 안전의 관점에서는 더 유리한 사람들이 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조차 자신의 정체성들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을 말해주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서로 터놓고 대화할 수 없는 부분,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생기게 된다. 더 깊은 관계로 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중요한 정체성들 중 일부를 감추고 내게 중요한 내 주변인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감각뿐만 아니라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억압그룹이나 경계그룹에 속한 사람들에게, 양육자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친구들이나 동료들과의 관계 등에서 자주 일어난다.
루미는 자신의 존재가 조이와 미라를 포함해 모든 이들에게 알려진 후 자기를 키워준 셀린에게 찾아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정 정체성(문양)에 대한 낙인과 억압을 강하게 내면화하고 있었기에(문양=악귀=죽여야 함) 그만큼 자신의 모습에 대한 혐오가 컸던 것이다.
셀린은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이 널 틀렸다고 했지만, 나는 너를 받아들이려고 했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넌 잘못된 존재지만 나는 너를 포용하려고 했다’고 들린다. 루미는 셀린에게 “왜 나를 사랑하지 않죠?”라고 묻는다.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라 아마도 평생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해왔을 것이다. 셀린은 “널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루미는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은 적이 없다고 소리친다. 평생, 셀린을 통해 문양을 감추라고 배웠고 혼문을 완성하고 귀마를 물리친 후 문양이 사라진 후에야 온전해 질 수 있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셀린의 포용이 아닌 ‘있는 그대로’ 포함이 필요하다
성소수자의 양육자들에게도 셀린에게 일어난 일이 생길 수 있다. 가정, 학교, 종교기관, 정치, 언론, 미디어에서 온통 ‘성소수자는 잘못된 존재다, 죄인이다’라고 배워왔다면 자신의 자녀가 성소수자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얘가 이렇게 됐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반응이다.
셀린이 한 말이 포용(또는 관용)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 사회는 ‘포용 사회’라는 단어를 많이 쓰고 있다. 포용이라는 단어는 ‘따뜻하게 받아들여주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여겨지며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포용이라는 용어는 권력 관계가 전제된 개념이다. 과연 누가 누구를 포용할 수 있을까? 소위 ‘정상인 사람’이 ‘비정상인 사람’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는 뉘앙스를 지울 수 없는 용어다. 남성이 여성을 포용해야 할까? 비성소수자가 성소수자를 포용해야 할까?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포용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특권그룹의 사람들이 억압그룹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만으로 배제(exclusion)되지 않는 모두가 동등한 주체로 포함(inclusion)되는 포함 사회(inclusive society)가 돼야 한다. 셀린과 루미의 대화를 통해 포용과 포함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너는 부족하다, 틀렸다, 열등하다, 고쳐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으며 나와 동등한 존재로 여길 수도 없다. 불쌍하기 때문에 도와주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에 분노하여 함께 싸우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정체성에 따른 권력 관계로 인해 배제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만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케데헌은 단순히 “한국적인 것”이 아닌, 한국 사회를 반성하게 하는 서사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세계적인 인기에 감동하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하며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고 “한국적인 것을 가지고 일본 회사와 미국 회사가 돈을 벌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반응들을 보며 나는 ‘과연 한국적이라는 게 무엇일까’하는 질문이 생겼다. 김밥, 사발면, 과자, 서울타워, 롯데타워 같은 것들이 “한국적인 것”일까? K팝 느낌의 노래가 나오면 “한국적인 것”일가? 물론 그것도 맞을 것이다. 나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적”이라기보다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경계인들(억압그룹과 경계그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억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서사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지금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서사다. 이 영화의 감독인 매기 강(Maggie Kang) 감독이 한국 배경을 가지고 있는 캐나다인 감독이기 때문에 그는 백인중심사회에서 인종, 민족, 출신국가, 언어 등에 의한 억압을 경험해 온 이주민으로서 경계인들의 삶을 그려낼 수 있게 한 것이다. 인종이나 이주를 둘러싼 문제뿐만 아니라 퀴어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슈를 접하고 경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고 작업하고 있기 때문에 담아낼 수 있는 주제였고 문제의식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적인 이야기로 성공했다”는 말은 와닿지 않았다. 루미가 경험한 아픔과 해방을 보여주는 스토리는 한국 사회를 반성하게 하는 내용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둘째로, 여성에 대한 억압이 여전히 공고한 한국 사회이기 때문에 나는 케데헌이 한국적인 이야기로 보이지 않았다. 헌트릭스는 젊은 여성들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다. 젊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한다.
한국 사회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나와 독재와 폭력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응원봉을 든 인파가 나올 때 지난 탄핵 집회가 떠오르기도 했다. 정권이 바뀐 후, 아주 강한 힘에 의해 의도적으로 여성들이 지워지고 있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국민의힘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정권을 잡은 민주당 역시 그렇다. 정치만의 문제도 아니다. 경제, 사회, 문화, 언론, 미디어 등 모든 영역에서 전방위적으로 여성의 존재가 지워지고 있다. 여성들이 여전히 의사결정을 하는 위치로 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더라도,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 사회를 반성하게 하는 이야기이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넷플릭스 겨우 그런 게 혼문이라면 파괴돼도 좋다, 다시 만들면 된다
헌트릭스가 하는 일, 즉 목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악을 물리치는 것은 우리 모든 시민들이 함께 해야 할 일이다. 악은 억압과 폭력이다. 이 사회의 억압과 폭력을 한 번에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일을 혼자 해낼 수 있는 영웅 같은 존재도 없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내야 한다. 헌트릭스의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장면에서 나는 영화 “위시”가 생각났다. 위시에서도 아샤가 먼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아샤의 친구들이 따라 부른 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노래할 때 악을 물리칠 수 있었다. 먼저 노래를 시작하는 사람은 있지만, 혼자서 악을 물리치는 영웅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노래를 해야 이길 수 있었다. 억압과 폭력에 저항하고 평등과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 그렇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행동을 모아가는 일이다.
셀린과 루미의 마지막 대화에서 셀린이 루미에게 ‘혼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자, 루미는 ‘겨우 그런 게 혼문이라면 파괴돼도 좋다’고 한다. ‘다시 만들면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루미는 루미를 억압하고 있었던 혼문을 깨고 나와 새로운 혼문을 만들어야 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필요하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착취하고 죽이고 있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성과주의 세상을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이 세상 모든 루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과 더 깊이 관계 맺으며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루미의 몸에 있는 문양을 사라지지 않았다. 퀴어가 비퀴어가 돼야 하는 게 아니고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돼야 하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진 문양(정체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존재를 사회 속에 당당히 드러내며 있는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