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5월 3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중단 국민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양지웅 기자
상호관세 발효일을 코 앞에 두고 31일 타결된 한미 무역협상에서 미국 측이 농·축산물 시장 개방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한국 협상단이 2008년 당시 광우병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추가 개방을 막았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본부장은 이날 워싱턴DC 주미대사관에서 진행된 브리핑에서 "한미 간 협상 합의사항에 농산물 추가 개방은 없다"고 밝혔다.
여 본부장은 "농축산물 관련 미국의 추가개방 요구가 거셌다"면서 "트럼프 대통령도 협상 초반에 농산물 이슈를 제기했다"고 협상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우리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로 인해 99.7%의 품목이 개방돼 있으며 미국쇠고기의 해외 제1의 시장이 한국이다', '(미국)농산물이 해외 시장에서 팔린 것을 볼 때 인구 수로는 세계 3위다', 등 여러 통계치를 제시하면서 정치적 민감성에 대해서도 최대한 설득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미국 측은 소고기 월령 제한을 유지하는 나라는 한국, 러시아, 벨라루스밖에 없다며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한국 협상단이 미국을 설득한 결정타는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광화문에 모인 시민들의 사진이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 광우병 사태 때 광화문에 모인 100만명 시위대 사진을 준비해 미국에 보여줬다"면서 "여 본부장이 준비했는데 한국 상황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쌀 시장 추가 개방도 국내 농민들의 거센 반대 여론 덕분에 막을 수 있었다. 여 본부장은 "2주 전 쯤 한국에서 농산물 개방 이슈가 본격적으로 언론화됐는데 미국도 한국에서 실제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서 아마도 한국의 민감성을 현실로 인지하게 된 계기가 됐고 그게 도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고기·쌀 개방은 막았지만, 농산물 분야의 비관세 장벽 완화 등 변수는 아직 남은 상태다. 이와 관련,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앞으로 검역 절차 개선, 자동차 안전기준 동등성 인정 상한 폐지, 기술 협력 등을 포함한 협의도 계속 이뤄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여 본부장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무역상대국을 대상으로 한 비관세장벽에 대한 압박이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안심할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의 '협의 취소'부터 스코틀랜드 '밀착 협의'까지...긴박했던 한국 협상단
한국 협상단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무역협상을 타결하기까지 긴박했던 일주일을 보냈다.
협상 초반 고위급 '2+2 통상협의' 일정이 돌연 취소되면서 한미 관세 협상의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앞서 지난 25일(현지시간) 구 부총리와 김 장관,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등이 참여하는 '2+2 통상협의'가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런 미국 측의 취소 통보로 무산되면서 구 부총리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발길을 돌렸다.
미국 측은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의 긴급한 일정을 이유로 들었지만 자세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에 같은 날 타결된 일본과의 무역합의를 두고 더 좋은 제안을 가져오라는 압박이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왔다. 이달 중순에서야 경제부총리, 산업부 장관 등이 임명되면서 협상 시간이 촉박했던 한국 정부로서는 악재였다.
'고위급 2+2 협의'는 취소됐지만 먼저 지난 22일, 23일 각각 미국 현지에 투입된 여 본부장과 김 장관이 트럼프 행정부와 접촉을 이어가며 협상안을 다듬었다.
김 장관과 여 본부장은 러트닉 상무장관과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을 만나 본격적인 협상을 벌였다. 한국 협상단은 24일 워싱턴DC 미 상무부 청사에서 회담한 데 이어 25일에는 뉴욕의 러트닉 장관 자택까지 찾아가 이틀간 협상을 이어갔다.
앞서 미국과 일본이 무역합의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 협상단에 조언을 하며 협상안을 최종 조율한 러트닉 장관은 이번 한국과의 협상 과정에서도 '키맨' 역할을 한 셈이다.
이 시기 대통령실도 한국 협상단의 보고를 경제·통상 관련 긴급대책회의가 연이어 진행하면서 서울도 긴박하게 돌아갔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일본 관세 인하를 대가로 5,500억달러(약 759조원)의 대규모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는 합의가 나오자 한국 협상단은 고민이 커졌다. 우리 측이 준비한 투자안은 일본이 제안한 규모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 장관과 여 본부장은 당초 25일 귀국하는 일정으로 미국 출장길에 올랐으나 귀국을 미루고 협상안을 매듭짓기 위해 러트닉 장관의 동선을 쫓기로 했다.
당시 러트닉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 수행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출국하자, 그를 쫓아 스코틀랜드까지 건너가 협상을 이어갔다.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출장 협상'에서 미국을 설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in) 프로젝트'가 나왔다.
김 장관은 "미국 쪽에 괜찮다면 스코틀랜드로 가서 계속 협상하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러트닉) 상무장관이 흔쾌히 시간을 내 협상 이어가면서 마스가 프로젝트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있었다"며 "스코틀랜드 일정에서 협상의 어떤 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마스가는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로 한국 기업의 주도로 미국 조선업에 투자를 진행한다. 실질적으로 기업이 투자에 나서는 등 구체적인 투자 계획과 트럼프 행정부가 강조하는 조선업에 대한 지원을 제안함으로써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0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열린 '한-미 통상협의 결과브리핑'에서 발표문을 낭독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장관, 구 부총리,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2025.07.31. ⓒ뉴시스
이번에도 투자금액 올린 트럼프..."그냥 OK 안 해"
29일에는 협상을 담판지을 구 부총리가 미국에 도착하면서 협상이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었다. 구 부총리는 김 장관, 여 본부장과 함께 러트닉 장관 등 미국 측과 두 차례 집중 협상을 벌이며 상호관세 문제와 한미 산업 협력 방안 등을 놓고 트럼프 대통령을 만족시킬 수 있는 최종안을 다듬었다.
이와 함께, 지난 28일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을 시작으로 29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워싱턴DC에 도착했으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방미길에 오르는 등 민간 기업이 한미 무역협상을 지원하는 모습이 연출됐다.
한국 협상단은 이날 백악관을 찾아 트럼프 대통령과 담판을 지었다. 일본, EU처럼 커다란 패널에 대미투자 규모, 관세율 등을 정리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 EU를 상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투자 금액을 수정했다.
김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냥 오케이 사인을 주진 않았다"며 그 자리에서 대미투자 금액이 오르락내리락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협상단이 일본과의 경제규모나 대미적자 규모가 10년간 현저히 적다는 점을 어필했고, 그 접점에서 만났다"고 말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이날 브리핑에서 대미 투자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 앞에 가기 전에 내세운 숫자들이 있었고, 우려되는 상황까지 걱정하며 참 많은 리허설도 하고 경우의 수별로 회의했다"면서 "러트닉 장관과 잠정적으로 합의한 안보다는 다소 좀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은 조선업 투자 1,500억달러를 포함한 3,500억달러의 대미투자와 1,000억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 제품 구매를 약속하고, 상호관세와 자동차관세를 15%로 인하하는 합의를 체결했다.
다만 대미투자 방안 등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빈칸으로 남아 있어 양국 간 추가 협상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