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트럼프 규탄’ 한마디를 못하는 정치권

미국 정부의 한국인 노동자 350여명에 대한 충격적인 체포·구금 사태가 자진출국 형태로 수습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리 정부는 오는 10일경 전세기를 보내 한국인 노동자들을 데려올 것이라고 밝혔다. 일단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구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한 만큼 이런 대응은 이해할 만하다. 다만 이번 사태에서 거대 양당의 정치인들이 묵묵부답하거나 우리 정부와 기업에 책임을 돌리는 한심한 모습을 보인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미국 이민 당국(ICE)은 이번에 문제가 된 사업장에서 체포, 구금된 이들이 ESTA(전자여행허가제)나 상용·관광 비자인 B1, B2 비자를 통해 미국에 입국했고, 따라서 현장의 노무를 제공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업무 진행이 관행적으로 이뤄졌고, 이들이 영구히 미국에 체류할 계획도 아니었다는 점은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

설사 미 당국의 법집행이 합법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노동자들을 중대 범죄자인 양 쇠사슬로 묶고 미란다 원칙의 고지도 없이 끌고 간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이들이 수용된 곳의 환경도 매우 열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와 인권을 앞세운다는 나라에서 이렇게 야만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은 할 일을 했다"면서 큰 소리다. 미국 정치의 후진성과 반인권성이 가감 없이 드러난 셈이다.

놀라운 것은 우리 정치권의 반응이다. 주요한 거대 정당들은 이 문제에서 '트럼프를 규탄한다'는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여당은 한미관계를 고려한답시고 입을 다물고, 국민의힘은 도리어 우리 정부를 문제 삼았다. 트럼프 정부의 반인권적 행태를 문제 삼은 정당은 4석을 차지하고 있는 진보당밖에 없었다.

구금된 노동자들의 석방을 우선해야 하는 정부로서는 다소 톤을 낮출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경우엔 전혀 다르다. 여야를 막론하고 미국 이민 당국의 만행을 크게 꾸짖는 게 도리어 정부간 교섭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주요 언론들도 마찬가지다. 비자 제도나 기업의 관행을 지적하기에 앞서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 행태에 분노하는 시민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부각했어야 했다.

같은 일이 중국에서 벌어졌다면 여야와 보수언론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미국이 관련된 문제라면 일단 머리부터 숙이고 보는 정치, 그것도 여야가 하나같이 그렇다니, 지금이 21세기의 한국인지 묻고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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