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는 거장의 역사이기도 하다. 김민기, 김수철, 김홍탁, 데블스, 들국화, 박성연, 이정선, 사랑과 평화, 산울림, 송창식, 신중현, 양희은, 이장희, 정태춘, 조동진, 조용필, 한대수 같은 음악가들이 없었다면 한국 대중음악은 지금처럼 풍성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대개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연주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면, 김희갑, 손석우, 이판근 같은 거장들은 무대 위 아래를 오가면서 한국 대중음악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이 곡을 쓰고 음악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언제 들어도 좋은 노래,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끌어올린 노래들을 만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세상은 이들을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 이들의 삶과 음악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았다.
방송작가로 활동해온 양희가 내놓은 다큐멘터리 ‘바람이 전하는 말’은 그 가운데 작곡가 김희갑에게 바치는 드물고 값진 헌사다. 김희갑은 김국환의 「타타타」, 송창식의 「상아의 노래」, 양희은의 「하얀 목련」,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그 겨울의 찻집」,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혜은이의 「열정」을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을 써낸 창작자다. 그는 지난 60여년 동안 무려 3,000곡을 써낸 명실상부한 국민작곡가다.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반드시 좋아할 곡들의 생산자가 바로 김희갑이다.
감독 양희는 2006년 김희갑 음악 인생 40주년 헌정 음악회 ‘그대, 커다란 나무’의 작가로 참여하며 김희갑과 친해졌고, 그와 만남을 이어오다가 2014년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멋진 음악가를 담은 영화 한 편이 없다는 현실이 어려운 영화작업을 짊어지게 했다. 그는 촬영, 편집, 제작을 맡은 프로듀서 허욱과 함께 10여년의 준비와 촬영과 편집을 거쳐 김희갑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영화를 완성했다.
작곡가 김희갑의 이갸기를 담은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 ⓒ ㈜욱희씨네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되었으며, 어떤 곡을 써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차근차근 훑는 영화는 그야말로 히트곡 메들리이자 한국 대중음악사 요약본이다. 영화에는 기타리스트 김광석, 김국환, 고 김홍탁, 양희은, 윤항기, 임희숙, 장사익, 조용필, 최진희, 혜은이를 비롯 그에게 곡을 받고 스타가 된 음악가들이 줄줄이 등장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 대중음악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사람도 절대 모를 수 없는 노래의 주인공과 사연이 이어지는데 재미가 없을 리 없다. 영화는 언제 지나가는지 모르게 순식간에 흘러간다.
이처럼 오래 좋아했거나 좋아했다가 잊고 있던 노래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일이 반복되면 결국 놀라게 된다. 이 많은 노래들이 모두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한 두 장르에 집중하고, 같은 스타일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희갑의 작품에는 경계가 없고 틀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같은 밴드 곡과 김상희가 먼저 부른 「진정 난 몰랐네」같은 팝을 함께 써냈고, 1970년대에는 송창식의 「상아의 노래」, 박건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양희은의 「하얀 목련」을 비롯한 포크 팝도 내놓았다. 1980∼90년대 대중의 사랑을 받은 김희갑표 팝 히트곡들 역시 장르와 어법이 다채롭다.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향수」가 다 그의 작품이며 뮤지컬 ‘명성황후’의 음악까지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이르면 그는 천재라고 확신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영화는 그를 신화화 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가 자신의 음악세계를 앞세우기보다 당시 대중들이 좋아하는 음악, 특히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음악을 써내는데 집중했으며, 이를 위해 얼마나 준비하고 고심했는지 담담하게 들려줄 뿐이다. 가령 「향수」를 완성하기까지 열 달이 걸렸고, 뮤지컬 「명성황후」를 만드는데 5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마주하면 그의 창작력이 집요하리만큼 성실한 노력의 결과물임을 인정하게 된다. 기타 연주자 활동을 겸한 그가 매일 같이 기타를 연습하고, 곡의 한 마디를 연습하려고 몇 시간씩 공을 들이는 연습벌레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영화는 김희갑의 정수가 놀라운 창작력만이 아니었음을 공증한다. 그의 작업은 끝없는 노력의 산물이었으며, 그는 그 작업을 기쁘게 감당하는 성숙한 인간이었다. 자신의 창작을 잘 해내기 위해 매일 운동해 왔다는 이야기 앞에서 존경심을 품지 않기는 어렵다.
작곡가 김희갑의 이갸기를 담은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 ⓒ ㈜욱희씨네
실제로 이 작품을 구상하고 준비하면서 작곡가 김희갑을 오래 만났다는 감독 양희는 그가 “어느 자리에서나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늘 편안한 미소와 친절함을 잃지 않았”고, “연장자라 하여 가르치려 하지도, 대가라 하여 다른 이를 낮추어 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고 증언한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며, 사람에든 예술에든 편견이 없”는 사람. “완벽한 연주를 위해 쉼 없이 갈고닦는 성실”한 사람이었음을 넌지시 드러내는 영화는 요란한 치장을 내려놓으며 더 큰 울림을 안겨준다.
영화의 미덕은 이뿐만이 아니다. 김희갑의 동반자로서 수많은 작업을 함께 해온 작사가 양인자와의 만남과 사랑, 작업 이야기까지 비중 있게 담아냄으로써 양인자 작사-김희갑 작곡으로 빚은 명곡의 공동 지분을 분명히 한다. 음악가들 이외에도 음악평론가/연구자 강헌, 박성서, 임진모, 장유정과 작사가 지명길 등이 김희갑-양인자 음악의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주는 방식은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을 한국대중음악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
그가 만든 명곡들을 모아 들으며 젖어들게 하는 영화는 그 또한 숙명 같은 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장면들로 비감하게 만든다. 음악에 모두를 걸어 우리를 위로했던 한 예술가가 쓸쓸한 말년을 감당하는 모습은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듯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한 거장 음악가의 일대기를 이렇게 정직하고 깔끔하며 다채롭게 담아낸 한국의 음악영화가 얼마나 있었던가. 왜 김희갑을 다룬 영화가 없나 싶어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 양희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이유다. 김희갑의 노래를 듣고 불러왔던 이들이라면 꼭 봐야 할 영화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오래도록 그의 노래에 빚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위대한 음악가를 기록함으로써 한국대중음악이 어떻게 영롱해졌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자발적으로 수행했다. 음악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도 지루하지 않고, 음악 마니아가 보기에도 담백하고 재미있는 음악영화다. 앞으로도 이런 노래가 계속 나오고, 이런 창작자가 꾸준히 이어지고, 이런 영화가 더 많이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가 극장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