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지학의 세상다양] 남성이 경험하는 성차별 사례를 찾으라는 대통령에게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성평등 관련 첫 지시로 “남성이 경험하는 성차별 사례를 찾아보라”고 한 발언이 화제가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형평’과 ‘균형’의 언어처럼 들리지만, 그 이면에는 젠더 체제에 대한 근본적 이해의 결여가 자리하고 있다.

‘성차별’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개념의 구조를 분명히 해야 한다. 성차별이란 하나의 성별에 더 많은 권력(권한)이 부여되어 그 성별이 성별만으로 이익(특권)을 누릴 수 있으며 그 성별은 다른 성별을 배제, 착취, 차별, 억압할 수 있는 사회구조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남성이 성차별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남성이 아닌 다른 성별(즉 여성)이 남성을 구조적으로 억압하는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 여태까지 그렇게 된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은 그와 정반대의 데이터들을 보여준다.

성차별을 혼동하는 사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채용, 승진, 임금, 안전, 의사결정권 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여전히 불리한 위치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남성들은 불안한 사회 속의 자신의 불안한 현재와 미래를 성차별로 해석한다. 이는 자신을 억압하는 주체를 잘못 인식한 결과이다. 군대 문제와 노동 문제를 포함하여 한국 사회에서 남성들이 겪는 불평등, 부조리, 억압, 폭력의 다수는 국가와 자본이 만들어낸 구조적 착취의 문제다. 그 착취의 대상이 남성이라 하여 그것이 곧 ‘성차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호 교차하는 권력의 불균형의 문제다. 국가가 시민을 불평등하게 대우하는 문제는 성차별이 아닌 국가에 의한 억압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훈련소, 부대, 군화, 훈련 (자료사진) ⓒ뉴시스

군대 문제 : 젠더의 문제가 아닌 국가의 문제

많은 남성들이 군 복무를 ‘역차별’의 상징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군대는 여성이 남성을 억압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청년 남성을 값싼 노동력으로 동원하는 체제이다. 군 복무는 근대국가가 ‘비장애인 남성 시민’을 생산하기 위해 설계한 통과의례였다. 여성과 장애인은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되었고, 오직 남성만이 ‘시민이 될 자격’을 부여받았다. 즉, 군 복무는 억압이 아니라 특권을 부여받는 과정이었다. 오늘날, 남성들은 군복무를 통해 시민의 자격을 얻는 특권은 사라졌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몸과 삶에 대한 통제 그리고 노동력에 대한 착취 구조는 잔존하고 있다.

이 문제를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국가가 청년의 노동 인권과 시민권을 정당하게 보장하지 않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군 복무 문제는 성평등의 범주가 아니라 국가의 책임과 시민권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공정 담론과 ‘맨박스’가 만든 착시

오늘날 청년 세대의 ‘역차별’ 담론은 공정이라는 신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시험과 경쟁을 중심으로 한 사회는 겉보기에는 성별을 초월한 평등한 기회 구조처럼 보인다. 그러나 평등은 기회의 순간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여전히 여성은 임금, 승진, 정치적 대표성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그럼에도 청년 남성들이 성차별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남자다움’을 강요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맨박스(man box)’라 불리는 남성성의 규범은 감정의 표현, 돌봄, 연대의 능력을 억압한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도 해롭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해롭다. 그 결과 남성들 역시 자신들이 답답하고 폭력적인 환경에 놓이며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도, 그 억압의 구조를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여성’으로 인식하게 된다. 정치, 경제, 언론, 미디어 등이 남성들의 그러한 생각을 유지하고 강화하게 한다. 이것이 오늘날 ‘역차별’ 담론의 구조다.

정치의 언어가 갈등을 증폭시킬 때

정치는 때로 사회적 불안을 동원하여 지지율을 얻는다. ‘남성 역차별 찾기’ 지시는 젠더 갈등을 완화하기보다는 증폭시키는 위험한 언어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불만이 ‘여론’으로 호명되는 순간, 사회는 분석의 정확성을 잃는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시민을 성별로 구분하여 피해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경험하는 착취·차별·폭력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다. 성평등은 특정 성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인간 존엄의 조건을 확장하는 국가의 책무이다. 공교육에서의 포괄적 성평등 교육, 차별금지법 제정, 노동권 보호, 복지의 재구조화 등 국가가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사회적 기반을 세워야 한다.

성평등은 인간의 조건을 회복하는 일

성평등은 남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성 또한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과정이다. 노동을 하면서도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은 적당하고,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안전하고 평등하게 표현하고 나눌 수 있고, 서로가 서로를(모두가 모두를) 돌보는 상호 돌봄의 사회—그 사회야말로 남성에게도 해방을 허락한다. 따라서 국가가 찾아야 할 것은 ‘남성의 역차별 사례’가 아니다. 그것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구조적 뿌리, 즉 권력과 폭력의 체계를 재생산하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국가 자신이다.

성평등은 단지 여성의 권리만을 확장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엄을 완성하는 일이다. 그 철학적 명제를 망각한 성평등 정책은, 언제나 갈등을 낳고 정의를 잃는다.

오후 민주노총 세계여성의날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 참가자들이 종로에서 대학로 방면으로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2024.03.08 ⓒ민중의소리


제언 : 대통령 언어의 전환, 인식의 전환

이 대통령은 이제 “남성이 겪는 성차별”이라는 잘못된 개념과 방향을 반복하기보다 “모든 시민이 경험하는 불평등의 원인과 구조를 바로잡겠다”는 방향으로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 정치적 상징으로서의 ‘성평등’은 더 이상 특정 성별의 이익을 조정하는 협상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 정의, 그리고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윤리적 명제이다. 이 대통령의 발화는 사회적 방향을 결정한다. 그 언어가 분열을 조장할 수도, 공존의 길을 열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대통령은 성평등을 기계적인 수준의 형평의 문제가 아닌 “정의의 문제”로 선포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이제 이 대통령이 말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어떤 집단도 서로를 향해 자신의 피해를 주장할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 인종, 민족, 종교, 지역,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장애, 질병, 외모, 나이, 학력/학벌, 고용의 형태, 소득/경제력 등이 어떤 차별도 만들지 않는 사회, 인간의 존엄이 국가의 최우선 가치로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겠다.”

이 한 문장이야말로 젠더 갈등의 언어를 넘어, 인권국가로의 전환을 선언하는 문장이 될 것이다. 이 대통령의 입이 그 언어를 품을 때, 비로소 한국 사회는 성평등, 다양성, 포함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