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질수록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네 줄 현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떨림이 허공을 흔들며 가슴을 붙좼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소리는 가늘고 길게 이어지며 마음속에 잠긴 오래된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가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한 세기 전 바다를 건너온 누군가의 사연이 담겨 있는 듯 애절했다. 조국을 향한 애타는 그리움을 노래하는 엘레지 같았다.
난생처음으로 소해금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량성희의 소해금 독주곡 앨범 <꽃이 피다>에 수록된 ‘울지 말아 을남아’였다. ‘울지 말아 을남아’는 항일투쟁을 그린 북한의 혁명가극 <피바다>에 수록된 곡으로, 배곯아 우는 을남을 달래는 어머니의 심정을 담은 노래다.
소해금이라는 악기는 생소했다. 모양뿐만 아니라 소리 자체가 새로웠다. 언뜻 들으면 바이올린 소리 같은데 뭔가 달랐다. 한국적 정서가 섬세하고 세련되게 압축된 특유의 소리맵시가 가슴을 복받치게 했다.
악기는 인간의 삶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 중 하나지만 소해금이라는 악기만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울림이나 안식은 남다른 면이 있는 듯싶었다. 거기에 량성희의 연주력이 붙으면서 마치 예상치 못한 시간과 마주한 듯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량성희가 생각하는 소해금의 매력이 궁금했다.
“소해금의 음색은 우아하고 부드러워요. 사람의 목소리와 매우 가깝다고 생각해요. 소해금의 맑은 울림 속에는 감정의 결이 깃들어 있어요. 소해금은 기쁨, 슬픔 같은 인간의 감정을 현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악기예요.”
나는 조선(朝鮮) 사람
한국에서 첫 독주회를 여는 재일조선인 량성희(37) 소해금 연주가. 량성희의 국적은 조선적이다. 남북한에 단일 정부가 수립되기 전 조국, 옛 조선이 바로 량성희의 나라다. 대다수 조선적 재일동포는 총련 사회와 연결돼 있지만 조선적은 단순한 국적의 표식을 뛰어넘는다. 조선적은 살아 있는 민족 정체성의 언어이자 세대를 거쳐 지켜온 기억의 유산이다.
국적은 법이 정하지만, 정체성은 삶이 만든다. 량성희의 가족은 일본에 거주했지만 조선인으로 살았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졌어도 조선인이라는 핏줄만큼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 히노마루(일장기)가 휘날리고, 사쿠라(벚꽃)가 흩날리는 거리를 걸어도 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는 바깥 세계와 다른 또 다른 세계가 유지됐다. 어머니의 된장국 냄새, 옷장에 걸린 치마저고리, 조용히 흐르는 민요의 선율…….
“할아버지 할머니 고향은 제주예요. 1948년 제주 4.3사건 이후 어려운 생계를 해결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우리 가족은 일본에서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살았어요. 어머니는 조선학교, 조선대학교(총련 민족학교)에서 공부했고, 조선학교에서 성악을 가르치는 음악 교원 생활을 했어요. 음식은 평상시에 가리지 않고 먹지만 광복절이나 정월 초하루 같은 명절 때는 꼭 민족음식을 먹어요. 아버지께서는 약주를 즐기시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족발이고요. 일본 사람들은 족발 안 먹거든요. 저는 한국에 와서 고궁에 가는 게 너무 좋아요. 경복궁, 덕수궁에 가봤어요. 음식은 짜장면과 청국장에 완전히 빠졌어요. 너무 맛있어요. (활짝 웃으며) 한국에 자주 와서 먹고 싶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고향 제주에서도 공연하고 싶고요.”
1세대 재일조선인은 일제강점기부터 한반도를 떠나 일본에 정착한 첫 번째 세대다. 이들은 일본 사회에 적응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고, 조국의 분단으로 인한 이념적 갈등도 경험했다. 그럼에도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지켰고, 차별에 맞서면서 일본 사회에 융화하려고 노력했다. 2, 3세대 재일조선인은 달랐다. 일본땅에서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자랐다. 이쪽에서는 ‘일본인처럼’ 행동하길 요구받았고, 저쪽에서는 ‘북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했으며, 다른 쪽에서는 ‘한국인이 되라’는 설득도 받았다.
량성희 연주가는 달랐다. 세 세계 사이의 틈새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굳이 세울 필요 없었다.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잡힌 건 오로지 조국과 조선뿐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4살 때부터 조선학교에 다니며 우리말과 글, 우리문화를 배워서 정체성 혼란은 겪지 않았어요. 일본식 이름도 따로 없고요. 조선 이름이 량성희니까 일본 사람들은 저를 량상, 성희상이라고 불러요. 오로지 조선만이 제 나라요, 제 정체성이에요.”
조선적은 우리 민족의 일원이고 재일동포지만 법적으로는 무국적자다. 여권부터 발급되지 않아 해외를 오가며 음악 활동을 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량성희는 세계 무대 진출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총련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평양 공연도 못할 수 있지만 민족교육과 민족예술의 정당성을 연주자로서 세계에 알리고, 자기 뿌리가 됐던 조선음악을 세계인에게 제대로 들려주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총련 사회는 제일 잘 나가는 연주자 량성희가 한국 활동을 결정하자 변심한 건 아닌지 반신반의했다. 어떻게든 한국 활동을 막아보려는 사람도 있었다. 량성희의 일념은 확고했다. 일부 사람들이 민족음악에 대한 진심과 열정을 몰라줘 속상했지만 여러 억측과 오해의 무게를 오로지 두터운 신념과 의지로 감당했다.
“그동안 제가 동포사회에 헌신하고 복무해왔던 역할은 좋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이제는 세계 무대에 나가 싸우고 싶어요. 재일조선인의 삶을 알리고 싶고, 소해금과 조선 클래식의 매력을 세계에 널리 소개하고 싶어요. 세계인에게 최고의 소해금 연주가로 인정받고 싶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속 남는 연주가가 되는 것이 목표예요.”
량성희 소해금 연주가 ⓒ민중의소리
나는 조선 클래식 연주자
량성희를 음악인으로 만든 첫걸음은 피아노다. 량성희는 4살 때 어머니 권유로 피아노를 시작하면서 음악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건반을 두드릴 때마다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고, 시간이 흐르면서 음악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어로는 전달할 수 없는 마음속 깊은 부분을 음악이 담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량성희는 중학교에 입학해 우연히 들은 소해금의 소리를 듣고 반했다. 맑고도 애잔한 소해금의 음색이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사람의 목소리는 다채롭다. 감정의 온도에 따라 수천 수만 가지의 색을 가진다. 기쁠 때는 맑고 투명하고, 슬플 때는 낮고 깊게 침잠한다. 소해금이 딱 그러한 악기였다. 손끝의 힘부터 활의 각도와 움직임까지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소해금과 처음 만난 것은 13세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소조활동(재능개발교육)을 하면서 소해금에 가장 마음이 끌렸죠. 감정의 파동이 그대로 소리에서 느껴졌거든요. 소조활동은 소해금을 가르쳐주는 강사도 있었지만 기술적인 부분은 주로 선배가 후배에게 가르쳐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요.”
피아노 건반과 달리 네 개의 현으로 수많은 소리를 직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량성희는 하루하루 연습을 거듭하며 연주의 완성도를 높였다. 일 년에 한 번은 <금강산가극단> 단원들과 함께하는 합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량성희는 어렸을 때부터 <금강산가극단>을 동경했다. <금강산가극단> 단원이 돼 소해금 연주자로 활동하길 원했다. <금강산가극단>은 북한 최고의 예술단이자 웅장한 소리와 에너지, 서로의 호흡으로 완벽한 하나의 음악을 만드는 프로예술가들의 집합체였다.
량성희 연주가는 중학교 2학년 때 북한에서 소해금을 배울 수 있는 ‘통신수강제도’를 알게 됐다. ‘통신수강제도’는 북한 교수들이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 고급부(고등학교) 영재들을 뽑아 40일 동안 교육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영재들이 다니는 평양음악대학의 예비학교라고 보면 된다.
량성희는 평양음악대학 통신수강에 참여하려고 늦은 밤까지 악보를 붙잡고 씨름했다. 힘들 때는 울듯이, 기쁠 때는 노래하듯이, 화날 때는 몰아치듯이 소해금으로 마음속 감정을 표현하는 연주법을 터득해갔다. 연주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경연에 나가 상도 휩쓸었다. 재일조선학교 경연에서 연거푸 1등상을 거머쥐면서 피아노를 칠 때부터 들었던 ‘음악 영재’라는 소리를 또다시 들었다. 당연하게도 ‘소해금 영재, 조선 클래식 영재’ 량성희는 평양음악대학 통신수강 대상자로 선정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오디션을 거쳐 3년간 평양에서 통신교육을 받았어요. 수업은 전공인 소해금뿐만 아니라 음악이론이나 장단 수업, 율동을 포함한 다양한 과목으로 이뤄졌어요. 한남용 교수에게 지도를 받았고, 남은하 학생에게도 일대일로 개인 레슨을 받았어요. 평양에서의 생활은 무척 행복했어요. 교육당국의 배려로 호텔에서 지내며 연습과 학습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평양 시내 관광이나 소풍도 즐거웠습니다.”
평양국립민족예술단 공훈배우이자 최고의 소해금 연주자인 남은하와 함께 찍은 사진. 량성희 연주자가 조선학교 고급부 시절 평양음악대학에서 배울 당시 대학생이던 남은하 연주자에게 일대일로 개인 레슨을 받았다. ⓒ민중의소리
량성희 연주가를 지도한 한남용(韓男用) 교수는?
1947년 3월 30일 함경북도 주을읍 출생. 1961년 평양음악대학에서 민족음악을 전공하고, 1969년 11월부터 해금 교원으로 활동했으며, 민족기악학부 학부장을 역임했다. 해금 전문가와 음악이론가로 활동하면서 대표적인 저서로 『해금교측본』, 『해금련습곡집』, 『해금곡집』, 『해금연주법』, 『저해금교측본』 등을 남겼다. 작곡가로서 활동을 하면서 해금독주곡 <방목공의 붉은 마음>, 소해금 독주곡 <우리의 동해는 좋기도 하지>, 소해금 협주곡 <세월아 가지 말아> 등을 창작해 해금 연주와 해금 교육을 이론화하고 체계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나는 <금강산가극단> 악장
량성희에게 소해금은 단순히 악기가 아니었다. 소해금은 자신을 표현하는 또 다른 목소리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가장 진실한 방법이었다. 량성희는 <금강산가극단>에 입단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력의 결실은 2007년 <금강산가극단> 입단으로 이어졌다.
량성희의 <금강산가극단> 입단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가 있다. 원래 <금강산가극단> 소해금 단원의 정원은 4명, 인원이 꽉 찬 상태였다. 당시 실력이 출중했던 량성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홍령월 <금강산가극단> 단장은 결단을 내렸다. 소해금 단원의 정원을 1명 늘리고 오디션을 열어버렸다. 오디션에는 수많은 소해금 연주자가 도전했지만 예상대로 1등은 량성희가 차지했다. 실력으로나, 성품으로나 량성희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2006년 홍령월 <금강산가극단> 단장을 만났다. 그때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점이 있다. 홍령월 단장은 음악에 대한 열정을 전우애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수준 높은 무대를 위해서는 단호한 선택을 마다하지 않았고, 음악의 질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연주자들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비춰 보면 홍령월 단장은 량성희의 재능과 성품을 무척 아꼈던 듯싶다.)
“오디션에 너무 많은 사람이 참여해 많이 놀랐어요. 다른 연주자들 신경 쓰지 않고 평소처럼 최선을 다해 연주했어요. 오디션에서 1등을 해 <금강산가극단>에 입단하고, 입단 후 신입 교육으로 평양에 갔을 때 처음으로 신률 선생님을 만나 직접 지도를 받았어요. 그때부터 맺은 사제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요.”
량성희 연주가는 <금강산가극단> 입단 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금강산가극단> 민족관현악단에서 11년간 악장으로 활동했고, 솔리스트로 광명성절 평양경축 공연을 비롯해 일본 전역에서 순회공연을 가졌으며, 도쿄시티필하모닉관현악단과도 두 차례 협연했다. 량성희는 20년 가까이 일본인들과 동포들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주는 활동을 해왔지만 주위의 편견과 선입견을 경험도 했다. 소해금 연주자라는 시선보다 재일음악인, 북한 예술단원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량성희는 개의치 않았다.
“관객들 반응은 지방마다 달라요. 고향이 오카마야현이고 학교를 오사카 쪽에서 나와 오사카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죠. 하지만 저를 음악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어요. 극장 앞에서 피켓 들고 서 있는 사람들요. 그래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것이 저의 존재를 증명하는 근거였어요. 재일조선인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이거든요.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느낀 적은 없지만 보고 들은 바가 있어서 약간 두렵긴 해요.”
량성희 연주가의 수상 경력은 화려하다. 북한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콩쿨 ‘2.16예술상’까지 수상했다. ‘2.16’은 북한의 주요 명절 중 하나인 광명성절로, 2.16예술상, 2.16과학기술상 같은 주요 표창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량성희는 <금강산가극단> 입단이라는 꿈을 이룬 후 ‘2.16예술상’ 수상을 목표로 삼았다. 재일조선인 여러 선배들이 2.16예술상을 수상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였다.
“2016년 제22차 2.16예술상에 참가했어요. 본선을 앞두고 10월, 11월에 1, 2선 예선을 거쳐 이듬해 2월 본선 무대에 섰지요. 예선과 본선에서 연주한 곡이 10곡이나 될 정도로 어려운 경연이에요. 8개월 동안 신률 선생님에게 개인 지도를 받으며 경연에 임했어요. 2.16예술상을 받게 돼 너무 기뻤어요. 경연에 참여하면서 실력이 많이 늘어 행복했고요. 신률 선생님께 너무 감사해요.”
량성희와 사제 관계를 맺은 신률 교수는?
신률은 소해금 연주가의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은 ‘국보적’ 연주가다. 18살에 이미 개인 독주회를 개최했으며, 공훈배우를 거쳐 인민배우 칭호를 수여받았다. 1958년 1월 2일 출생. 5살 어린 시절에 바이올린으로 연주자에 입문해 13살에 소해금으로 전환했다. 신동이자 천재 소리를 들으며 성장해 평양음악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한남용과 함께 소해금 발전에 주력했다. 혁명가극 ‘피바다’의 기악곡 창작과 연주에서 ‘피바다가’, ‘울지마라 을남아’ 등에 참여했다. 평양음악대학을 수석으로 졸업 후 <만수대예술단>에 발탁돼 연주자로 활동했으며, 이후 <피바다가극단>에서 작곡과 연주를 병행하며 관현악단 악장으로 재임했다. 2015년부터 평양음대 교수로 재직 후 현재는 퇴직해 작품 창작과 저술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량성희 연주가는 일본 도쿄에서 2017년 ‘2.16예술상’ 수상 기념 공연을 가진 뒤 소해금 앨범 <내 사랑하는 꽃>을 평양에서 녹음해 출시했다. 동명의 앨범은 2024년 12월 한국에서 앨범 <4현의 사랑>으로 소개됐다. 2025년 8월에는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디지털 앨범 <꽃이 피다>를 서울에서 녹음해 발표했다.
량성희는 평양에서 앨범을 녹음했을 때와 달리 서울에서 앨범을 녹음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서울 녹음실 스텝들과 민족음악의 정서를 공유하기 힘들었다. 서울 스템들이 서양 클래식 관점에서 북한 음악을 들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는 여러 선생님들이 음반 작업에 같이 참여해주셨어요. ‘여기 다시 해 봅시다, 한번 더 해 봅시다’ 리드하면서 녹음을 했거든요. 근데 서울에서는 소해금이 낯선 악기이기도 하고 북한의 음악을 잘 몰라서 제가 끌고 가야 했어요. 북한 악기는 민족성을 바탕으로 한 서양 악기이기 때문에 장식음이 민요풍으로 나와요. 이런 게 낯선 거죠. 소해금 연주는 미분음이 많아요. 정확한 음을 딱 누르는 게 있고, 조금 아래음을 눌러 민요적 느낌을 내기도 하는데 서양 클래식에 익숙한 귀로 들으면 음정이 불안하다고 느껴요. 반면 녹음 기술력은 서울이 좋았어요.”
량성희 소해금 연주가 ⓒ민중의소리
나는 소해금 세계 전파자
량성희 연주가의 소해금 독주회 ‘꽃이 피다’가 11월 25, 26일 오후 7시 30분 마포 토마토홀에서 열린다. 공연 실황은 독주회가 끝난 뒤 유튜브 채널 <토마토클래식>에서 볼 수 있다. 이번 공연은 북한에서 독자적으로 발전시켜온 ‘조선 클래식’을 초연하는 무대다. 비록 공연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남북 음악 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해본다.
한국에서는 국악의 범주에서 북한의 음악을 바라보며 전통의 맛과 멋이 부족하다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여태까지 제대로 된 북한 음악 공연과 마주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 량성희 독주회는 북한이 반 세기 넘게 개전하고 확보한 조선 클래식의 고유성과 독창성의 정수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소해금은 1960년대 북한에서 2현 해금을 4현으로 개량한 민족악기다. 조선 민족악기의 꽃으로 불릴 정도로 북한의 악기를 대표하는 국보다. 소해금은 바이올린을 모델로 개량됐다. 해금보다 바이올린에 가까운 소리를 내 민족관현악에서 바이올린을 대체하는 악기로 자리 잡았다. 또 서양의 악보를 보고 연주하기 때문에 서양 클래식과도 융합이 잘 되고 조화로운 게 특징이다.
량성희는 ‘음악은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언어’라고 믿는다.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시선을 마주치며 한 음 한 음을 들려줄 때, 서로의 마음이 이어지는 듯한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량성희가 외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생 소해금 연주가의 길을 걷고 싶은 이유다. 량성희는 이번 독주회 공연을 마치면 기획 앨범 출시와 세계 무대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올해 11월 한국 첫 데뷔 무대를 끝내면 내년에 일본에서 정식 음반을 출시해서 그래미상 월드음악 부문에 도전할 거예요. 유럽 무대 데뷔도 계획하고 있고요. 소해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입문자 교본도 집필 중이에요.”
량성희의 국내 첫 독주회는 20여 년간 남북 예술교류 현장을 지켜온 문화기획자 이철주의 공이 크다.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이철주 하나아트컴퍼니 총감독이 말미에 덧붙인 얘기다.
“량성희는 소해금을 많이 알리고 싶어해요. 일본에서 학생지도를 많이 하니까 기회가 되면 한국에서도 개인지도나 공개강의나 마스터클래스 할 수 있는 시간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번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독주회 공연에도 많이 와 주세요. 우리가 직접 조선학교에 가봤을 때의 느낌처럼 소해금 소리도 무대에서 들어봐야 확실히 알아요. 사운드도 좋고, 소해금과 피아노 딱 2악기로 구성되고, 무대도 관객석과 가까워서 정말 만족하실 거예요. ”
량성희 연주자가 <사랑하는 꽃> 독주집을 선물했다. 집에 귀가하자마자 CD플레이어에 앨범을 넣었다. 량성희의 소해금 연주는 내면과 조용히 마주하는 시간을 선사했다. 말로는 다 하지 못한 복잡한 감정들이 음악의 파동 속에서 하나씩 피어오르며 가슴속에서 잔물결을 일으켰다. 량성희와 소해금이 결코 다른 나라의 사람과 악기가 아니지 않은가. 량성희 소해금의 그 여린 떨림 속에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일념, 애환과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가 함께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