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혁 국민의힘 당대표가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 중앙계단에서 열린 대장동 일당 7400억 국고 환수 및 검찰 항소포기 외압 규탄대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2025.11.12 ⓒ민중의소리
‘체제’를 사유화하며 헌법정신을 참칭하는 보수세력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 1항의 선언은 명료하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국가는 특정 지도자나 정파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엄숙한 선언이다. 헌법 전문이 명시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또한 자율과 조화를 통해 사회의 다원성을 보장하고 권력의 책임을 묻는 기제이지, 특정 세력이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이념적 칼날’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정치사에서 ‘체제’라는 단어는 헌법정신을 수호하는 방패가 아니라, 반대 세력을 절멸시키기 위한 창으로 악용되어 왔다.
한국 보수 정치는 오랫동안 ‘체제’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이승만의 반공주의가 그러했고, 박정희의 유신 독재가 그러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쳐 윤석열 정부의 ‘반국가세력 척결’ 주장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체제에 대한 위협’이라 주장하며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윤석열이 지난해 벌인 12·3 비상계엄 사태는 이러한 ‘체제 수호’의 논리가 얼마나 손쉽게 ‘헌법 파괴’의 논리로 뒤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 비극적 실증이었다.
‘경쟁자’를 ‘적’으로 지목한 위험한 도박
최근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꺼내든 ‘체제 전쟁’이라는 섬뜩한 단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이는 나치의 법률적 토대를 닦았던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논리를 답습하고 있다.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에게 정치란 의회에서의 지루한 토론이나 타협이 아니라, 우리를 위협하는 '실존적 적'을 식별하고 그들을 물리적으로 배제하는 투쟁이었다.
윤석열이 지난해 12월 3일 대국민담화문을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했다. 이날 밤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는 시민들. 2024.12.3 ⓒ뉴스1
장 대표는 “민주당을 싸움터로 끌고 와 밟아 짓이겨야 한다”며 슈미트의 나치식 주장을 소환했다. 이 논리 안에서 상대 정당은 국정을 논의할 ‘경쟁자’가 아니라, 국가의 생존을 위해 박멸해야 할 ‘공적(公敵)’으로 전락한다. 슈미트는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대화와 절차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무력한 말장난”이라 조롱했고, 그 결과는 히틀러라는 괴물의 탄생이었다.
국민의힘 지도부가 주장하는 ‘체제 전쟁’은 민주공화국의 핵심인 ‘다원성’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집단을 ‘체제 위협 세력’으로 낙인찍어 공론장에서 추방하려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헌법이 그토록 경계하는 전체주의의 서막이다. 민주주의는 적을 섬멸하는 전쟁터가 아니라, 갈등을 제도 안으로 녹여내는 용광로여야 하기 때문이다.
체제는 정파의 ‘전리품’이 아닌, 시민의 ‘공공재’
지금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체제전쟁’이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는 민주공화국의 일상을 ‘전쟁터’로 규정하고, 상대 정당을 궤멸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태도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오세훈 서울시장, 박형준 부산시장 등이 국힘 내부에서 계엄 옹호 세력과의 단절을 외치며 중도 확장을 꾀하고 있지만, 보수 진영 전반에 깔린 ‘체제=나’라는 등식이 깨지지 않는 한, 이는 공허한 외침에 그칠 수밖에 없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25.11.24 ⓒ민중의소리
‘체제’는 특정 정치세력이 승리하여 차지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시민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숨 쉬는 공적 공간이다. 이런 공적 공간을 두고 벌어지는 정치대결의 방식인 선거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전쟁이 아니라, 시민이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숙의의 과정이다. 정당이 헌법의 언어를 전쟁의 언어로 대체할 때, 공화국의 토대는 허물어진다.
진정으로 헌법을 부정하는 자는 누구인가
‘체제’를 볼모로 삼아 적대적 정치를 강화하는 방식은 결국 민주주의의 자멸을 초래한다. 대한민국 체제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정치를 전쟁으로 만들고 헌법정신을 진영 논리에 종속시키려는 내부의 야만성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체제 전쟁’ 선포가 아니다. 헌법 제1조가 가리키는 민주공화국의 본령, 즉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하는 정치의 복원이다. 이 질서를 부정하고 상대를 절멸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그들이야말로 헌법을 부정하는 ‘반헌법 세력’임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