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전직 법조인들의 기괴한 재판 놀이, 블랙 코미디 연극 ‘트랩’

씁쓸함을 남기는 하룻밤의 '사고'가 '덫'이 되기까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원작 연극 '트랩' 재연 무대

2025 연극 '트랩' 공연 사진 ⓒ세종문화회관

요즘처럼 법률 용어가 일상 속으로 들어온 적이 있나 싶다. 올 초 대형 서점에서는 헌법 코너가 생겼다. 헌법 전문이 실린 도서와 헌법 필사 도서가 나왔고, 특정 재판은 현재 중계되고 있기도 하다. 법률 용어가 낯설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보니 2025년 재연 무대에 오른 연극 '트랩'은 초연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연극 '트랩'은 스위스 출신 세계적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단편소설 '사고'(Die Panne)를 원작으로 한 블랙코미디이다. 이 작품은 시골 작은 마을 은퇴한 전직 법조인들의 ‘재판 놀이’를 통해 인간의 위선과 사회 모순을 드러낸다. 원작의 제목처럼 하룻밤 '사고'로 시작된 이 이야기가 '덫'이 되는 과정은 볼 때마다 씁쓸함을 남긴다.

하룻밤 '사고'가 '덫'이 되기까지


섬유회사 판매 총책임자 트랍스는 출장길에서 차가 고장 나는 사고를 겪는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 트랍스는 우연히 퇴직한 판사의 제안을 받는다. 자신의 집에 머무르면서 저녁 식사와 함께 자신들의 놀이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다. 집주인은 전직 검사 ‘초른’, 전직 변호사 ‘쿰머’, 전직 사형집행관 ‘필렛’과 함께 ‘재판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이제 트랍스는 이 재판 놀이의 ‘피고’가 된다.

1950년대 유럽 상류층의 식탁으로 설정된 무대는 더할 나위 없이 정갈하고 품위 있다. 하지만 전직 법조인들의 모습은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 헝클어져 있다. 법의 권위를 상징했을 법복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고 펄럭거리는 장식은 흡사 검은 까마귀를 떠올리게 한다. 삐에로를 연상시키는 복장의 가사도우미 ‘시모네’는 최고의 코스 요리와 프리미엄 와인으로 저녁 만찬을 이끈다.

2025 연극 '트랩' 공연 사진 ⓒ세종문화회관

눈과 코를 자극하는 아름다운 식사와 달리 이 전직 법조인들의 의도는 음흉해 보인다. 이들은 트랍스의 유죄를 단언한다. 마치 털어서 먼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듯. 우스꽝스러운 재판 놀이는 시간이 더해갈수록 의도를 드러낸다. 트랍스의 유죄를 밝혀내려는 전직 검사와 트랍스의 유죄를 무죄로 만들려는 전직 변호사. 이들의 노련한 질문과 유도 신문은 트랍스를 ‘덫’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이 마주하는 불편한 진실


무대이자 재판정이고 만찬장이자 형벌대가 되고 마는 이 한밤의 식사는 어떻게 끝을 맺게 될까? 관객들은 전직 법조인들의 유희였던 재판 놀이에서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아니 의식하지 않았던 죄를 찾아내는 트랍스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트랍스의 이야기는 잘 짜인 한편의 범죄로 완성된다.

술에 취해 여기저기 널브러진 전직 법조인들과 술잔으로 헝클어진 고급 식탁 위로 트랍스는 자신도 몰랐던 죗값을 치르고 만다. 자신들의 놀이를 망쳐버린 트랍스를 원망하는 이들의 마지막 대사는 기괴하기보다 잔인하다. ‘왜’라는 질문이 관객에게 주어진 해석에 달린 것이라면 연극 '트랩'을 만난 관객들은 어떤 해석을 안고 돌아갔을까? 관객들은 누구의 민낯을 마주하게 되었을까?

2025 연극 '트랩' 공연 사진 ⓒ세종문화회관

초연과 재연 무대는 닮은 듯 다르다. 초연은 우연한 사고로 시작된 이야기가 기괴한 재판 놀이로 이어지기까지 과정이 드라마틱 했다면, 재연 무대는 제목 그대로 재판 놀이로 그려지는 ‘덫’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전직 법조인들은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놀이라는 이름으로 법의 칼을 들이대 인간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자신들이 캐내면 못 찾아낼 죄가 없다는 이들의 사냥 본능 역시 마냥 웃어넘기기 힘들다.

남명렬, 손성호, 김신기, 이승우 등 서울시 극단을 대표하는 배우들과 배우 박건형의 노련한 연기가 인상적인 블랙 코미디를 완성한다. 법률 용어가 많이 등장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 와인에 조애가 있는 관객이라면 극의 전개와 함께 등장하는 시칠리아 그릴로, 샤토 파비, 샤토 마고 등 명품 와인이 반가울 수 있다. 코스로 등장하는 음식의 향연과 가사도우미 시모네가 연주하는 피아노곡들은 연극을 오감으로 즐길 수 있게 한다. 연극 '트랩'은 11월 3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 시어터에서 공연된다.

연극 '트랩' 공연 정보

공연 장소: 세종문화회관 S 시어터
공연 날짜: 11월 7일 (금) ~ 11월 30일 (일)
공연 시간: 화 ~ 금 19시 30분 / 주말 15시 / 월요일 공연 없음
관람 연령: 2012년 이전 출생자(2012년생 포함)
러닝 타임: 90분
원작: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창작진: 각색 변유정 / 재각색, 연출 하수민 / 안무 이새승 / 무대디자인 남경식 / 조명디자인 김영빈 / 의상디자인 EK / 분장디자인 김종한 / 소품디자인 곽내영 / 음악감독 이호근
출연진: 박건형, 남명렬, 강신구, 김신기, 손성호, 이승우
공연 문의: 세종문화티켓 (02-39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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