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화해, 국립극단 연극 ‘태풍’

복수 대신 용서를 택한 노년의 셰익스피어, 여성 서사로 다시 만나다

연극 ‘태풍’ ⓒ국립극단

휘몰아치는 거대한 바람과 태풍을 닮은 소리가 무대를 진동한다. 고요했던 관객석은 순식간에 긴장으로 가득 찬다. 배에 탄 사람들은 위태로운 바다 한가운데서 곧 닥쳐올 불길한 상황에 휩싸인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무대는 이내 고요하고 평화로운 섬으로 변한다. 섬에는 프로스페라가 딸 미란다와 함께 살고 있다. 미란다는 어머니가 마법으로 일으킨 태풍으로 인해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태풍으로 시작된 연극 ‘태풍’은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템페스트’를 독창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국립극단의 2025년 마지막 무대이기도 하다. 원작에서 밀라노의 공작 프로스페로는 동생 안토니오에게 권좌를 빼앗기고 딸 미란다와 함께 바다에 버려진다. 이번 공연은 밀라노 공작 ‘프로스페로’와 나폴리 왕 ‘알론조’를 여성 인물로 재해석해 각각 ‘프로스페라’와 ‘알론자’로 설정하고,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했다.

셰익스피어 ‘템페스트’를 재해석한 독특한 무대


여신동 무대 디자이너가 구현한 무대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동화 속 세계를 연상시킨다. 흰 천으로 뒤덮인 무대 전면과 그 앞에 펼쳐진 초록빛 섬은 배신과 복수의 배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치유의 공간에 가깝다. 이 환상적인 공간은 피비린내 나는 복수보다 아름다운 화해와 용서가 더 잘 어울린다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연극 ‘태풍’ ⓒ국립극단

연극으로서는 이색적으로, 뮤지컬을 연상케 하는 라이브 연주가 공연 전반에 더해진다. 초반을 압도하는 태풍 장면은 물론, 마법과 정령이 등장하는 몽환적인 순간들에서 라이브 연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소리는 무대의 감정을 증폭시키며 관객을 섬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난파된 배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인물들은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착각과 안도감을 안은 채 섬에 갇힌다. 관객은 자연스레 동생의 배신으로 쫓겨나 외딴섬에서 12년간 마법을 익힌 프로스페라의 복수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알론자의 아들 ‘페르디낭’이 프로스페라의 딸 ‘미란다’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두 젊은이의 사랑은 복수가 아닌 화해와 용서를 향한 결말을 예고한다.

국립극단다운 한 해의 마무리


프로스페라 역은 관록의 배우 예수정이 맡았다. 예수정은 2020년 ‘화전가’에서 묵직한 존재감으로 극을 이끌었고, 최근 영화 ‘사람과 고기’에서는 노년의 일탈을 섬세한 감정으로 표현해 깊은 공감을 얻은 바 있다. ‘태풍’에서도 그의 무게감은 여전하다.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의 내면을 절제된 연기로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연극 ‘태풍’ ⓒ국립극단

배우 홍선우를 비롯해 황선화, 이경민, 문예주, 윤성원, 성근창, 박윤희, 구도균, 김나진, 김은우, 하재성, 이강호 등 국립극단 전·현직 시즌 단원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극을 단단하게 채운다. 앙상블이 만들어내는 밀도는 국립극단다운 완성도를 보여준다.

복수 대신 용서와 화해를 선택한 노년의 셰익스피어가 남긴 마지막 작품은 연말을 맞은 관객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 가장 연극적인 대사, 동화 같은 무대, 탄탄한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지며 국립극단의 한 해를 의미 있게 마무리한다. 연극 ‘태풍’은 12월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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